북경용천사 소개

기사입력:2012-09-30 05:20:48
용천사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전란을 겪고 원나라때 재건되어 명나라 말기까지 이어오다가 점차 쇠락해갔다. 청나라 건륭제 후기에 창평주부가 원래는 용천사의 동측에 있었으나 금룡교를 중축으로 하여 동향으로 서측에 놓여있던 사찰을 북쪽에 자리하며 남측을 바라보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뉴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천 년의 풍파와 많은 세상 일을 겪으며 용천사 고찰에도 마침내 신생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2005년 4월 11일 용천사는 정식으로 종교활동장소로 회복되었다.

북경용천사는 웅장하고 수려한 서산 봉황령 아래 첩첩이 병풍처럼 겹쳐진 산봉우리가 북경시를 굽어 내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용천사는 요나라 응력 초년(서기957)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며 1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봉황령은 역사적으로 주필산신산할아버지산으로도 불려왔다산에는 삼불동현원동선인동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수행하는 동굴이 많이 있으며  몇몇 동굴의 벽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어 지금까지도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다용천사 부근에는 대각사상방사황보원묘봉암각의암조양동  고사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용천사  앞에는 수령이 600 년이   그루의 측백나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산문을 들어서면 북경에서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단공석교인 금룡교가 맞이한다금룡교는 용천사의  번째 주지였던 계승 스님이   간의 탁발수행을 통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오래되어 얼룩덜룩해진 석교는 천여  동안 무수한 신중들을 마음의 피안으로 이끌었다사찰 내에 있는 생기발랄한 은행나무  그루도 여전히 무성한 가지와 잎이 1  년간 피고 지며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있다.

용천사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전란을 겪고 원나라때 재건되어 명나라 말기까지 이어오다가 점차 쇠락해갔다청나라 건륭제 후기에 창평주부가 원래는 용천사의 동측에 있었으나 금룡교를 중축으로 하여 동향으로 서측에 놓여있던 사찰을 북쪽에 자리하며 남측을 바라보는 형국으로 바뀌었다민국시기에 용천사의 법회가 흥성하여 광동성에서   신도가 발심 기부하여 교각 남동쪽에 만연  천막을 설치하여 차와 죽을 나누어 주며 선연을 넓게 맺게 되었다항전시기국가의 내우외환으로 용천사도 점차 침체되어 갔다해방 초기에 용천사에는 단지 10 칸의 건물이 남아 있었으며 후에 문화혁명 기간에 민가  기타용도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년의 풍파와 많은 세상 일을 겪으며 용천사 고찰에도 마침내 신생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2001 해전구 정부  여러  있는 신도들이 사찰의 면모를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2005 4 11 용천사는 정식으로 종교활동장소로 회복되었고중국 불교협회 부회장  비서장이신 쉬에청 법사를 주지스님으로 모셔왔다이는 북경시 해전구가 건국이래 처음으로 정식 개방한 불교 삼보 사찰이다.


편집:설원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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