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에청 스님-범인들의 세상에 등불을 밝히는 사람

기사입력:2012-02-09 18:31:00
2012년 음력 2월8일, 출가한지 30년이 된 쉬에청 스님은 오랫동안 불교의 전통적인 계율을 지키고 중국 한전불교의 공부와 수행 체계 설립, 인재 양성, 불법 홍보 및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왔습니다.

                 쉬에청(學誠) 스님-범인들의 세상에 등불을 밝히는 사람

 

 

2012년 음력 2월8일, 출가한지 30년이 된 쉬에청 스님은 오랫동안 불교의 전통적인 계율을 지키고 중국 한전불교의 공부와 수행 체계 설립, 인재 양성, 불교사업 홍보 및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왔습니다.

 

어린 시절에 출가하여 중국 불교계 최초의 대학원생, 중국 최연소 유명 사찰의 주지스님이 되신 분입니다. 30년간의 세월을 지내오며 쉬에청 큰스님은 여러 고초를 참고 견디며 새시대의 고승으로 불교를 부흥시키는 원대한 바람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계시며 현대사회의 새로운 트렌드에 맞으면서 국가를 사랑하고 불교를 사랑하는 정서를 전파하여 인생을 전진하도록 인도하는 등불을 밝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종교는 결코 절하고 향을 피우고 꽃과 과일을 공양하고 채식만 하는 피상적인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마음속이 어두워질 때 오래도록 밝히고자 하는 등불입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현재 중국 전국정치협상협회 상무위원, 중국불교협회 회장, 제11차 중화 전국 청년연합회 부주석, 복건성 포전엔 광화사 주지, 섬서성 부풍현 법문사 주지, 북경 용천사 주지를 맡고 계시며, 2007년 태국 朱拉隆功 불교대학에서 교육행정학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11년 전인도 비구승가회에서 경.율.론인 "삼장대법사"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북경 용천사는 웅장하고 수려한 서산 봉황령 아래 첩첩이 병풍처럼 겹쳐진 산봉우리가 북경시를 굽어 내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용천사는 요나라 응력 초년(서기957년)에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며 1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쉬에청 큰스님의 속명은 부서림이며, 1966년 복건성 선유의 불교가정에서 태어나셨다. 조모는 오랫동안 불교를 공부하신 후에 출가하셨고 어머님은 아주 신실한 불교도입니다. 삼형제중 큰아들입니다. 초등학교의 수업을 마친 후 그는 밥을 짓고 빨래 하고, 물을 긷는 등 부모님을 도와 스스로 집안일을 했습니다. 어른들이 산에 올라가서 땔감을 마련하자 그는 주말시간을 이용하여 십여 리의 험준한 산 길을 걸어 자기 머리보다도 높게 땔감을 지고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나르는 듯이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조모와 어머님의 영향으로 10살부터 부서림은 자발적으로 채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2살이 되면서 그는 불경을 읽기 시작했고 어린 마음에도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현장대사(玄奘大师)의 '서쪽으로 한 걸음 가고 죽음을 당하더라도 동쪽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즉 앞장서서 나아가 법을 구하고 불교문화를 전파한다는 전세정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1982년 음력 2월8일, 16살의 부서림은 복건성 포전 광화사에서 출가했습니다. 1년 후에, 은사스님이신 정해장로님께 머리를 깎고 법호를 학성으로 받아 장엄한 의식 속에서 출가를 했습니다. 근대 유명한 고승인 인광대사와 홍일대사의  제자인 원졸 노스님을 따라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절에 들어가서 신선한 느낌과 친근한 느낌을 가지며 쉬에청 큰스님을 열심히 노력하여 착실히 공부했습니다. 그때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겸 자의위원회 주석이신 원졸노법사께서 특별히 이 젊은 사람을 중시하시며 그를 정성껏 하지만 엄격하게 가르쳐 <사미율의>와 <논어>등 많은 경전을 외우도록 하셨습니다. 율은 행동함에 있고, 지는 배움에 있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배운 것을 익혀 나날이 많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한가할 때도 청소를 하고 당직을 맡아 일을 진중하게 하며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노법사님은 쉬에청 스님의 총명함과 지혜를 보고 더욱 그의 인품과 덕성의 배양을 중시하셨습니다. 한번은 쉬에청 스님이 공양간의 바닥을 청소할 때 노법사님이 갑자기 공양간에 오셔서 검사를 하시고 여러 사람 앞에서 깨끗하지 못하다고 혼을 내셨습니다. 노법사님이 이렇게 한 것은 그의 심성이 온건한 지, 무던히 비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조급해하지도 않고, 겸손히 비난을 받아들여  즉각 여러 차례 닦으며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아 노법사님이 만족하실 수 있게 해드렸습니다. 

 

힘든 수행을 겪고 쉬에청 큰스님은 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복건불교대학 예비반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1984년, 18살이 된 그는 북경에 있는 중국 불교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학습과 수행의 길로 들어서며 그는 아주 귀중한 시간을 특별히 아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파도처럼 부침이 있어 항상 순탄하지는 못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그는 노법사님께 편지를 써 마음을 터놓았습니다. 그는 편지 중에 "대학에서 여러 사람들이 공부하고 싶어하지 않고 멍청히 시간을 보내니 자기의 마음이 아프고 광화사로 돌아가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얼마 후에, 노법사님은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말고 너는 겸허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노법사님의 글을 보고 은사의 일깨움을 체득하여 청년의 걸음을 시작할 즈음 외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으면 어찌 앞으로 수행을 하고 불법을 널리 알릴 것이며 중생에게 이로운 사업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차츰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번잡스러운 것들이 그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공부하는 기간에 그는 열심히 경, 율, 논의 삼장 경전을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비범한 의지로 3년의 시간동안  <대비주> 10만 번을 외웠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부단히 자신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당시 중국불교협회 조박초 회장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조박초 회장은 늘 그를 마음이 착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 인정하시며 그를 큰 인재가 될 것으로 믿으며 아꼈습니다. 1988년 쉬에청 큰스님은 대학원을 들어가서 사천 성도 문수원 관림법사님 아래에서 삼단대계를 청했습니다. 같은 해, 복건성 광화사 주지스님이 은퇴하시자 조박초 회장의 관심하에 의연법사님과 전체 집사의 추천으로 23살인 쉬에청 스님이 새로운 광화사 주지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의 음력 2월 초파일에 승좌 의식을 거행한 후에, 쉬에청 스님은 중국에서 제일 젊고 학력이 제일 높은 주지스님이 되었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홍일대사, 원졸노법사님의 법맥을 계승하여 광화사에서 대중을 이끌고 수행, 공부하며, 불법과 계율에 따라 불교 전통을 회복하고 사찰의 입장료를 받지 않고 상업 경영을 하지 않고 참회를 재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여러 해 동안 지키고 사찰은 중생을 교화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광화사는 이것으로 조박초 회장님으로부터 전국 3대 모범 총림의 하나로 지정되었습니다.

 

1991년, 쉬에청 큰스님은 중국불교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1993년, 27살에 그는 중국불교협회 부비서장이 되셨습니다. 북경에 계시던지, 외국을 방문하시던지, 그는 겸손하게 나이가 많은 법사님을 봉양하고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고 자기의 마음을 어떻게 연마하는지, 중생을 제도하는 능력을 배웠습니다. 조박초 회장은 "계율로 자기의 마음의 의지를 굳건하게 하고, 사물을 대할 때 겸손하고 유하게 하고, 공부하고 수행할 때는 문을 나서지 않고 열심히 하며, 소리의 가르침이 멀리 산기슭까지 닿으며, 도량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여기로 와서 보면 알 것 같다." 라며 쉬에청 스님의 부처님께 향하는 마음과 높은 덕행을 칭찬하셨습니다

 

2004년1월16일, 쉬에청 큰스님은 섬서성 법문사 주지스님이 되셨습니다. 법문사는 불교 성물인 석가모니불 손가락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지위가 아주 높은 곳입니다. 같은 해 11월11일은 약사불의 성탄일에 그의 정성스런 노력으로 법문사 불교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5년 동안의 수고를 통하여 법문사 불교대학은 국가종교사무국의 허가를 받아 정식적으로 설립되어 중국 서북지구 제 1호 한전불교 고등 불교대학이 되었습니다. 2006년 7월, 제 1차 "법문지광" 복혜캠프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6번을 치뤘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매번 친히 법문사에 가셔서 청소년을 지도하며 그들이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생명가치에 대해 사고하기를 바랬습니다.

 

옥수지역 재난지구 위문




용천사 입주 북경시 불교 성상을 재건하다


2005년 4월 11일, 용천사는 건국이래  북경시 해전구에서 처음으로  삼보가 구족한 불교사찰로 정식 개방되어 쉬에청 큰스님을 주지스님으로 모셨습니다. 용천사는 요나라 때에 건립되기 시작한 곳으로 천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사찰입니다. 세월의 변화를 겪으며 파손되고 쇠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처음 용천사에 와서 옆 사람이 전부 훼손된 모습을 보고 탄식할때, 쉬에청 큰스님은 오히려 석교 고목 가운데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힘과 영성을 읽어내셨습니다. 옛일을 돌이켜보면 쉬에청 큰스님은 이슬처럼 사리사욕이 없으셔서 “내가 1984년 북경에 왔을 때, 많은 거사들이 외지의 도량을 찾아 다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나는 북경에서 여러분들에게 불교를 배울 수 있는 장소, 수행할 수 있는 삼보의 땅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는 원을 세웠습니다. 21년 후인 오늘, 인연이 드디어 무르익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소가 정해지고 승단이 이어서 입주하니 문제와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맨손으로 집을 일구어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도 모두 반드시 똑같이 쉬에청 큰스님은 마음을 쓰고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이런 것 이외에도 겨우 남아 있던 10여 칸의 오래된 소박한 목조건축물 외에, 물, 전기, 난방 등의 기초시설도 모두 완전하지가 않았고 식사와 숙소 조건도 더욱 단순했습니다. 사찰에서 쓰는 물은 산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다 쓰는 것으로 입동시기에 옛 수도관은 얼어버려 승려들은 다른 지역에서 물을 길어다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용수 부족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문제로 쉬에청 큰스님은 승려제자들을 이끌고 산간 원수지 제방에 이르러 진흙을 파내고 모래를 쌓아 물 저장고 용량을 확대했습니다. 북배로 땅을 파낼 때, 시공이 무척 어려웠는데 쉬에청 큰스님은 공사장에서 밤을 새우며 불교도량을 짓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용천사를 다시 짓는 일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쉬에청 큰스님은 고통스럽다 생각지 않으셨고 거절하지도 않았습니다. 용천사의 복원과 개방이 국가, 사회, 불교, 중생에게 독특한 의미와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힘든 노력을 거쳐 복원 및 확장 공사후의 용천사는 고대 건축물의 전통 품격과 시대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나타내면서 학습 수행에 편리한 모습으로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불당, 강당은 넓고 밝게 바뀌었고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었고 학습교실은 조용하고 격조를 갖췄으며, 도서관도 풍부하게 장서를 보유했습니다. 새로운 면모를 점차 눈 앞에 드러내며, 쉬에청 큰스님은 줄곧 중시해왔던 인문 수행이념을 구현하셨습니다. 

 

용천사에 입주를 시작하면서 쉬에청 큰스님은 승단 건설을 매우 중시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공간의 인연 하에서 어떻게 하면 승단을 조직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불교계 앞에 놓인 중요한 임무를 완성할지를 심사 숙고 하셨습니다. 큰스님의 엄격한 심사하에 용천사는 새로운 형식의 승단은 무에서 유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신심과 도심으로 관념을 만드는 방면에서 우수한 자에 중점을 두어 선발하였습니다. “사람은 능히 도를 널리할 수 있다. 오직 “지, 도, 덕, 재, 학”을 겸비한 우수한 승려를 양성해야만이 청정하고 조화롭고 발전하는 정법 승단을 세울 수 있으며, 대원력, 대자비, 대지혜, 대행위의 고승대덕을 배출 할 수 있다”라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귓가에 그 말이 울리자 기자의 발걸음은 쉬에청 큰스님을 따라 가볍고도 안정적이게 앞을 향했습니다. 용천사는 거의 전체 건축물로 어떻게 회랑을 통과해서 와도 머리는 같은 처마로 연결되어 마치 몸이 제단에 있는 듯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 속에서 윤회의 도를 느끼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말을 멈추고 불당에 들어서 기상했습니다. 기자와 불교 신도가 같이 새벽 4시 반의 여명전의 어두움 가운데에서 아침 수업을 들었습니다. 견행당은 용천사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지세가 오옥구 북안에 세워져 사찰내 승려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행장소입니다. 건물의 꼭대기 선당은 청정하고 소박한 멋이 있으며 경관이 아주 좋으며, 바깥에는 산보를 할 수 있는 테라스가 있어 산바람과 아침이슬을 맞을 수 있으며 달과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산 길에는 등불이 없고 발자국 소리가 번잡하게 지나갑니다. 하늘색이 한 시간의 아침 수업 염불 소리 속에 점차 하얗게 밝아오고, 파랗게 물들며 점차 푸르게 밝아집니다. 종, 북, 경쇠, 목어와 범음과 함께 새로운 하루가 서서히 시작됩니다. 가사를 입으신 쉬에청 큰스님이 두 손을 가슴 앞에 합장하시고 고요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경전 독송을 이끄시어 마치 계곡물이 졸졸 맑고 밝게 흐르듯이 유창하고 풍부한 운율로 울립니다.

 

불교도에게는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습니다. 재가 신도는 거사라 칭합니다. 비록 시내와 거리는 비교적 멀지만 용천사에서 귀의한 거사가 아주 많습니다. 갈색 해청, 광목을 나란히 입었습니다. 사찰내 각 부문의 운영도 대부분 거사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거사의 역할을 아주 중시하시며, “모두가 착한 일을 하고 발심하여 참여하면 아주 좋다. 거사는 역량이 큰 사회 단체이며 거사의 기초가 결여되면 출가인이 하는 일이 성공하기가 어렵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민중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종종 주위에 있는 거사에 대한 느낌에 의해 결정되고 이로 인해 거사의 형상이 어떤 의미상으로는 불교형상을 대표한다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재가거사를 정확하게 인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당대 불교계가 진지하게 사고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불법을 가까이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바른 믿음을 수립하는 것, 사회와 민중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이 보시기에 중생을 위한 무아발심은 말로만 계속하는 허무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제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큰스님은 용천사에서 매년 10여 차례의 대형 법회를 거행하시어 누적인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었습니다. 2006년 정월 초하루부터 14일까지 “ 봄맞이 기복 화엄법회” 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이 함께 춘절(설)을 보냅니다. 초닷새에는 쉬에청 큰스님께서 찬바람이 살을 에일 듯한 노천 법회장에서 200여명의 신도들에게 귀의를 전수하시고 사람들이 심적인 평온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십니다. 6년간 용천사 법무는 부단히 성황을 이루어 왔고 청명제, 중양절 경로 따뜻한 마음 법회 등 풍부하고 다채롭게 치루어 왔습니다. 2009년부터 큰스님은 법회 유형에서도 변화를 주어 인연을 맺는 것에서 교육으로 전환하셨습니다. 모두들 동시에 추진하며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기 위해 용천사에서는 “용천강당”을 설립하고 국내외 전문가 학자를 초정하여 문화학술 교류를 진행하여, 신도들이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창을 열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법을 널리하고 이롭게 하며 사회에 복을 가져오는 것은 사찰의 제 1 책임입니다. 쉬에청 큰스님의 인도하에 용천사는 2006년 북경시 인애자선기금회를 세워 자비로 세상을 구제하는 마음을 사회 대중에게 전달했습니다. 2008년부터 기금회는 북경시 지구에 3곳의 인애심잔을 개설하여 3년간 모두 50만여 그릇의 죽을 봉양하였고, 매년 30여 만 명에게 혜택이 미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2008년 남쪽지방의 폭설재해와 원촨 지진 때에도 기금회는 모두 1600만여 위엔을 모금하여 이재민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2010년 옥수지진 때에도 200 만여 위엔을 모금하였고 옥수 제3완소를 위해 재난지역에서 가장 큰 3500 평방미터의 판자건물을 지었습니다. 옥수에서 쉬에청 큰스님은 친히 재난 소멸 기복법회를 여러 차례 집도하시고 세 가지 재난이 영원히 없어지도록 기원하셨으며, 희생자들이 정토세상에 왕생하고, 이재민들에게는 길상안강을, 아름다운 터전을 재건할 수 있기를 기원하셨습니다.

 

몸으로 가르침을 먼저 행하고 신앙과 인생을 설명하다

 

“불”은 범어에서는 “불타”, 즉 “깨우친 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성과 지식, 정감과 능력이 원만한 경지에 오른 사람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인류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계, 정, 혜” 즉, 행위를 규범하고, 내면에 집중하고, 지혜를 일깨우며, 시비와 선악을 명백히 알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번잡하게 안절부절 못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고 의리를 가벼이 여기는 환경 속에서, 개인의 순수한 평화를 유지하고 민중이 도량이 넓고 관대함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불교 수행장소로써 사찰이 처음으로 맞는 도전입니다. 국내의 많은 유명사찰은 풍경이 유려한 곳과 어우러져 있어 현지의 중요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명소를 세우고 입장료를 받고, 프로모션을 해서 과도한 이익이 모이는 곳은 불가의 청정한 수행을 특징으로 삼는 것과의 충돌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찰 본연의 기능이 달라지는 돌출된 문제에 맞춰 쉬에청 큰스님은 우려와 경계를 하시며 “사찰은 종교적 역할을 더 많이 발휘해야 하며, 인간을 정화하고 화합을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오히려 여행, 경제, 접대 등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종교 본연의 기능, 공간에 충격을 주고 있다. 만일 종교의 세속적인 성분이 많아지면 신성성이 사라지고 특수성이 실종된다. 그러면 종교의 사회에 대한 가치, 대중에 대한 흡인력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상업화 운영을 거절하는 것은 쉬에청 큰스님과 용천사가 자각하여 견지하는 원칙입니다. “출가인은 예부터 장사를 하지 않는다. 만일 금은보화의 유혹을 참아내지 못했다면 불법도 천 년을 넘어 지금까지 전승해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큰스님은 스스로 주지를 맡았던 세 곳의 사찰을 시작으로 사찰과 현지 관광지와의 관계를 끊고 입장료를 받지 않고 향과 경서를 무료로 제공하여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사찰 본연의 이화현상이 단지 불교 전승과정 중에서 맞닥뜨린 문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물질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사람들의 위기감이 커지고, 초조함과 걱정이 많아져 정신적인 의탁을 찾기 시작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민중이 신앙이라는 지지대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이미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임무가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큰스님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신앙과 인생이 추구하는 것을 설명해주셨습니다. 큰스님이 주지를 맡은 절에서 매년 음력 4월 15일에서 7월 15일까지 모든 출가인이 모여서 수행하는 오랜 제도인 “하안거”를 실행하셨습니다. 특히 용천사에 계실 때에는 늘 북경시내와 교외를 왕래하시며 새벽에 절에서 출발하셔서 중국 불교협회사무실까지 가셨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오시곤 했습니다. 잠시 휴식하고 19시부터는 승려들을 이끌고 한 시간 반 동안 비구계를 가르치셨습니다. 수업 후에도 제자들이 강렬한 희구심으로 방장실에 찾아와 가르침을 구할 때에는 거절하지 않으시고 깊은 밤까지 의문에 대한 답을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떠난 후에 초목이 울창한 깊은 산골짜기에서 벌레들이 우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모두들 잠을 청하는 시각에도 방장실의 불은 여전히 밝게 켜져 큰스님께서는 시간을 아끼어 남은 업무를 처리하시고 자신의 수행도 열심히 하셨습니다.

 

늦은 밤까지 계속된 업무에도 다음날 새벽 종소리에 일어나시어 정좌로 명상을 하시고 귀의 발심하시며 하루의 계획을 생각하십니다. 예전에는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될 때마다 큰스님께서는 문을 걸어 닫으시고 오로지 정진수행 하셨습니다. 지금은 사무가 복잡해졌지만 여전히 방법을 찾아내어 시간을 쪼개어서 수행 학습하시거나 혹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단기간의 정진을 하고 계십니다. 쉬에청 큰스님은 여러 경서를 두루 읽으십니다. 설령 출국을 하시더라도 불교 서적을 늘 곁에 두시어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으십니다. 또한 끊임없이 글을 쓰시어 10여 년간 100만 자의 글을 써서 안팎의 시선과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렇게 노력하셨기에 큰스님은 제자들에게 “오늘은 쉽게 온 것이 아니니 조금의 나태함도 보여서는 안 된다. 하루를 가치 있게 보내는 것은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보다 더욱 큰 의미가 있다. 학습과 수행을 하나로 하여 안과 밖 모두 충실해야 한다. 오직 스스로 공덕을 구족해야만이 법을 널리 펼쳐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정진은 말의 격려, 행동의 제시와 같습니다. 지금 현재를 잘 행해야 하며 매사에 신중하고 방일해서는 안 됩니다.

 

용천사에는 자급자족할 수 있게 경작하는 과수원과 밭이 있어 큰스님께서 스님들을 이끌고 일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절 안의 공사현장에서 건설자재를 옮기는 것 외에도 땔감을 채집하고 땅을 경작하며 스스로 “고(苦)”를 깨우칩니다. 한번은 몸이 좋지 않아 의사의 지시로 요양을 해야 했지만 큰스님께서는 “나태하고 게으른 습관을 키우는 것은 앞으로 쉽게 고칠 수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공양시간에 사람들이 “큰스님은 남쪽 지방 분이신데 만두 드시는 게 잘 맞으십니까?”라고 묻자 큰스님은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먹는 가 하는 것은 그 곳의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라며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큰스님은 소박하고 간소한 옷차림을 하십니다. 한번은 시자가 큰스님의 가사가 헤진 것을 보고 새로운 가사를 준비하고자 하였으나 쉬에청 큰스님은 그것을 아시고는 “새로 준비할 필요 없다. 방장이 되어 지금까지 이 가사로 15년을 함께 했고 잘 기우면 계속 입을 수 있다.”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몸소 실천하시어 가르침을 주시고 그에 맞춰 말씀으로도 가르침을 주십니다. 큰스님께서는 만일 한 사회가 물질에 대해서 과도하게 미련을 갖는 다면 인문정신의 배양과 가치를 초월하는 긍정을 경시하여 일정 정도의 인간 정신가치의 유실을 초래하고 사회 책임감 결핍, 군중 도덕 상실, 개인과 사회의 부조화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며 또한 “신앙의 실종은 개인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관심과 보살핌에 이를 수 없게 하고 각종 욕망 속에 빠지게 합니다. 사회와 인륜의 관계도 개인의 이익에 다다르는 도구와 수단이 될 뿐 입니다. 사람이 만을 작은 나(小我)만 돌본다면 생명은 너무나도 국한적이 될 것입니다. 경건한 마음, 공경심, 포용심, 자비심이 부단히 늘어날 때야 만이 정신과 생활의 질이 높아질 수 있으며 인생도 비로소 아름다워집니다. 신앙을 찾기 위해서 사회책임감을 수립하고 군중 도덕을 다시 갖추려는 노력은 반드시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매번 적합한 장소에서 쉬에청 큰스님께서는 청년들과 만날 때 자신의 경력과 생각, 깨우친 바를 공유하시고 함께 인생가치의 소재를 토론하시고 불교이론과 나아가 사회도덕에 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큰스님께서는 뉴밀레니엄 시대에 민중의 물질생활이 향상되어 정신문명 건설도 반드시 더욱더 중요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의 문화와 가치관은 다른 문명, 민족, 민중의 인정과 동의, 이해와 감상을 얻어야만 하며 반드시 개인의 사리를 초월하는 시야를 가져야만 합니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사상과 문화가 시대조류에 순응하고 그 조류를 이끌 수 있다면 그 뜻이 변하지 않는 기초 위에서 시대와 인연을 맺어야만이 오래도록 전승되고 발전될 수 있었습니다.

 

블로그, 세계를 향해 중화문화를 알리다

 


오랫동안의 관찰과 사고를 통해 전국정협상위의 쉬에청 큰스님은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중화문화 건설과 확충에 힘쓰셨습니다. 많은 채널과 형식을 통해 세계에 전파하고 중화문화를 알리는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하셨습니다. 2008년 3월 9일 쉬에청 큰스님은 전국정협 11회 1차 회의에서 <국가문화소프트파워 건설 강화>라는 주제로 대회발언을 하셨습니다. “중국의 소프트파워건설은 자기문화가치관으로 다른 문명의 문화가치관에 충격을 주거나 제거하고 침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문명 속의 사라지지 않는 지혜를 힘써 보이는 것이며 다른 문명 속에도 같은 지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다른 문명 속에 자기 문명과 다른 특수한 점을 존중하고 감상하는 것입니다. 단일성, 동질성, 재제성, 확장성은 중화문명에 내재된 논리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2011년 “양회”기간에도 큰스님께서는 “전통문화의 뿌리를 지키는 것”을 주요 의제로 삼아 발언을 하시며 경제 발전에 따라 현재 일련의 사회문제, 가치관 문제가 갈수록 대두되고 있고 중화전통문화의 전승과 확대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짙은 중화문화의 기운은 용천사의 영혼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중화문화 가운데 우수한 부분을 불교의 지혜, 자비, 평등, 원융 정신과 함께 더욱더 잘 전파하기 위해서 쉬에청 큰스님은 전통 종교 의궤를 고수하시는 동시에 인터넷 등의 현대적인 수단을 통해서도 홍법활동을 하시어 중화문화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쏟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2006년 2월 21일 “쉬에청 큰스님 블로그”가 정식 개통되었고, 중국대륙 불교계의 “제 1호 블로거”가 되셨습니다. 2012년 1월까지 쉬에청 큰스님의 포스팅 수는 5,000편에 이르며 방문자가 800여 만명에 이릅니다. <스님, 블로그>는 쉬에청 큰스님 블로그를 엮은 문집으로 수십본이 출판되었습니다.

 

블로그를 개설하던 최초의 뜻을 이야기하며 쉬에청 큰스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개인의 수행으로 보자면 참선과 독경은 네트워크가 필요 없지만 요즘 사람들은 항상 컴퓨터를 사용하니 신도들이 매일 절에 와서 강좌를 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로 인해 홍법이라는 각도로 보자면 네트워크는 아주 중요합니다. 막 시작했을 때는 블로그가 이렇게 까지 큰 영향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블로그를 개설하게 된 인연은 시나닷컴 책임자와의 담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블로그는 새로운 사물이었고 이제 막 하게 되어 깊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후에 네트워크가 불교와 사회를 하나로 이어주고 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될수록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불교의 홍법 형식은 사회발전에 맞춰 적응해나가야 하며 모두들 즐겨 듣고 보게 하여야 합니다. 출가인들도 고대에 사는 사람이 아니므로 용기를 갖고 새로운 사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08년 8월 8일 북경 올림픽이 개막하던 날 쉬에청 큰스님이 정성을 들여 구축하신 “용천의 소리”전통문화 홈페이지가 개통했습니다. 8월 24일, 올림픽 폐막식 날, 홈페이지 영어사이트가 성공적으로 구동되었고, 용천사는 이로써 중화문화를 주제로 하는 정식 외국어 전파 채널을 갖게 되었습니다. 홈페이지는 매일 창작글을 게재하고, 세계 각지에 있는 몇 천명의 봉사자들이 참여하여 편집과 글을 올리며 원거리 네트워크 회의를 개최하고 원고를 청탁, 발송하는 업무를 협의하고 있습니다. 6년 동안 쉬에청 큰스님이 바쁘신 와중에도 친히 블로그의 글을 감수하시고 독자들의 댓글에 회신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플랫폼을 통해서 큰스님은 현대인들의 심리적 어려움, 스트레스, 고통에 맞춰 불법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후련하게 마음속에서 지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특별히 봉사자들이 책임을 맡으며 성장하고 자아영혼을 향상시켜 국가의 걱정을 대신하고 민족을 위해 어려움을 풀어줄 수 있기를 희망하셨습니다.

 

2009년 4월 11일 “쉬에청 큰스님 웨이보”는 참신하고 다원적인 홍법 플랫폼을 대중 앞에 내놓았습니다. 2011년 2월 17일 원소절에 “쉬에청 큰스님 웨이보”를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일본어, 한국어 등 8개 국어로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현재 웨이보의 팬은 9만여 명에 이릅니다. 내용은 민생, 교육, 문화, 과학기술, 예술, 국제교류 등의 주제를 다루며 국내외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쉬에청 큰스님의 관심하에 용천사는 번역센터를 설립하고 고등교육기관의 교수, 언어 전문가 및 해외에서 귀국한 고급인력을 모았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가끔 단어 하나의 번역법을 두고 인터넷 상에서 밤이 깊도록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현재 매일 많은 외국의 네티즌들이 흥미를 가지고 불경과 중화문화와 관련된 주제를 큰스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외국 매체는 “중국의 큰스님이 8개국어 웨이보로 외국인에게 경전을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소개를 하기도 했습니다.

 

불교현대화와 세계를 향한 중화문화 전파의 추진자로서 쉬에청 큰스님이 특별히“불교발전과 국가 명맥은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세계가 대세로 블로그, 홈페이지, 웨이보를 통해서 불교를 사회와 하나로 연결하고 세계를 향해 중화문화를 펼쳐 보이고 자기생명 속으로 걸었던 여정 및 단체에서 발생한 모든 것을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후대에 기록을 남겨 후세가 선대인들이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말했는지, 어떻게 생활하고 공부하고 수행했는지를 남기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의 역사적 책임이며, 후세가 깨우치는 귀감의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강조하셨습니다.

 

용천이 감로수를 내뿜고 푸른 물이 든 청산에는 새들이 날아다닙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에 인도에서 기원했습니다. 교주이신 석가모니는 일찍이 귀한 신분으로 카필라국의 왕자였습니다. 일생의 영광, 지위, 세간의 오욕을 내려놓고 진리를 찾아 떠나 중생이 고통을 벗어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어려운 수행을 거치셨습니다. 기원년 전후로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어 중국의 토속사회와 끊임없이 부딪히고 서로 융합하여 중화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한나라 명제가 꿈에 정수리에 빛이 나고 몹시 큰 달 같은 금인을 만난 이틀 후 천축국의 고승이 동토 백마에 경전을 싣고 와서 중국에 사찰을 창건했습니다. 몇 천 년의 시간이 흐르며 가시밭길 같은 수 만리의 신앙의 길에는 많은 선구자들의 발자국이 덧입혀졌습니다. 구마라습은 서역에서 동쪽을 향해 갔고, 현장법사는 동쪽에서 서역을 향해 가는 등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 있는 행동, 구사일생의 기록이 역사에 영원히 새겨져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후퇴하거나 걸음을 멈출 때도 있습니다. 현세의 과객이 되어 피안의 세상을 보기도 합니다. 종교란 단지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꽃과 과일을 올리고 채식을 하는 표상적인 것이 아니며,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질 때 오래도록 밝게 빛날 수 있는 등불 하나를 밝히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역사상의 많은 대덕 고승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이유는 그분들이 사치하지 않고 욕심 없이 의연히 원칙을 지키며,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본연의 참된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며, 사람의 마음의 덕행의 아름다움, 내재적 아름다움에 이르기 위해 깊은 골짜기의 난초처럼 자연적인 고상함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쉬에청 큰스님의 마음속에도 중생들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 자신의 고통을 잊으십니다. 큰스님께서는 실패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이 성공의 희망이 있으며 부지런히 일해야만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그래야만이  얼굴에 기쁨, 맑고 아름다움, 청량함, 유쾌함, 흐르는 구름처럼, 물 흐르듯이 여유 있는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 연꽃이 물을 만나지 못하면 해와 달이 하늘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가 이러한 경계는 어떻게 수행으로 이룰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내가 없으니 두려움이 없고, 사사로움이 없으니 근심이 없습니다. 온 것은 이름이 없고 가는 것도 이름이 없다. 홀로 즐거움이 여럿이 즐거운 것만 못하다. 만일 내면의 탐욕을 뽑아버리지 않으면 외면에 고행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니, 법으로만은 충분치가 않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배우고, 진실되게 지성으로 임하라는 쉬에청 큰스님의 평온하고 담박한 말씀이 생생히 귓가에 맴돕니다.

 

편집:系统管理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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