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아티샤 존자의 계시

Author:쉬에청 큰스님     기사입력:2016-07-04 12:54:46
2006년12월8일 (옴력 10월18일)은 아티샤 존자의 원적(圓寂) 기념일입니다. 쉬에청(學誠) 큰스님은 다음날 오전에 아티샤 존자의 계시라는 주제로 범문을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이 행해야 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불법은 삼보, 부처님,모든 선지식으로부터 생기고 모든 중생에게 쓰이는 것입니다.


1.아티샤(阿底峽)존자

1)카스트가 원만하여 선근이 깊고 두터웠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음력 10월 18일은 10세기말에서 11세기 중엽의 대덕이자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아티샤(阿底峽)존자의 원적(圓寂)일입니다.장족지역(藏地)이든 한족지역(漢地)이든 아티샤 존자는 모두가 존경하는 분으로 티베트불교의 부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아티샤 존자는 원래 방글라데시인으로 그의 부친은 국왕이었습니다.이 국왕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첫째는 연화장(蓮花藏),둘째는 월장(月藏),막내는 길장(吉藏)으로 불렸습니다.훗날 이 국왕의 첫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고,둘째 월장은 출가를 하여 법명을 길상연등지(吉祥燃燈智)로 지었으며,그가 바로 훗날 사람들이 아티샤 존자라 존칭한 분입니다.

아티샤 존자는 유년시절에 아주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지혜가 많았습니다. 10살 전에 이미 의방명(醫方明:오명(五明)의 하나로 의술과 조제를 연구하는 학문임)과 공교명(工巧明:오명 중 기술,공예,음양,역술 등에 관한 학문임)등을 잘 배웠습니다.그리고 역사,문학 등에도 아주 통달했었습니다.그때 존자는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이미 알았으며,열심히 계를 지키고,수행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선근이 매우 깊었습니다.

2)유명한 스승을 두루 찾아,오명에 통달하다

11살이 되어 아티샤 존자는 황궁의 생활에 아주 싫증이 났습니다.황궁의 생활이란 없는 것 없이 다 있고,풍부하고 다채로워 세간의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하지만 존자는 뜻밖에도 그렇게 어린 시기에 세간의 허례허식,진실하지 않은 오욕(五欲)쾌락에 대해 싫어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즉 염리심(厭離心)과 출리심(出離心)이 생기고 ,그 해로움을 매우 싫어하여 외부로 나가 깊은 산속으로 가서 당시의 수행인을 찾아 뵈었습니다. 

수행인에는 출가한 법사도 있지만 당시에는 바라문 교도들도 있었습니다.과거의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아주 극명하여,바라문 카스트는 가장 높은 지위였고,바라문 교도는 항상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고결하다고 여겼습니다.아티샤 존자는 원래 왕자 출신이어서 이 바라문교도가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일종의 비교적 부귀하고 지위가 있으며 특수한,즉 너무나도 높은 지위의 형상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바라문이 아티샤 존자를 보았을 때 바로 아티샤 존자가 오신 뜻을 알아챘습니다.그가 아티샤 존자에게 말하기를 “나의 수행정도는 이미 일반인의 수준을 초월했습니다.그래서 내 마음속에 이미 국왕이나 노예라는 개념이 없어졌습니다.즉,당신이 왕자든 국왕이든 아니면 일반백성이든 상관없이 내 마음속에서는 똑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반대로 말하면 이 바라문 자신은 이미 다른 사람보다 높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아티샤 존자는 이 말을 들은 후에 이 바라문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그는 자기가 가져온 보검,용품 등을 모두 이 바라문에게 공양하고 이 바라문이 그를 섭수(攝受:부처가 자비심으로 일체중생을 살피고 보호함)해 주시기를 기구(祈求)했습니다.

이 바라문이 아티샤 존자를 알게 된 후에 나란타사(那爛陀寺)에 가서 보리현론사(菩提賢論師)를 찾으라고 알려줬습니다.아티샤 존자는 이 바라문의 인도에 따라 나란타사에 당도하여 보리현론사를(菩提賢論師)만났습니다.그런 후에 보리현론사가 그에게 “너는 명료두견보살(明了杜娟菩薩)을 찾아 감이 마땅하다.”라고 알려주자 아티샤 존자는 명료두견보살을 알현하고 그 후에 명료두견보살이 또 그에게 흑산 남부로 가서 아박도제(阿縛都帝)존자를 알현하라 지시했습니다.

아티샤 존자가 아박도제(阿縛都帝)존자의 법문을 들은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와 부모님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그의 부모는 자기의 아들이 출가를 결심한 것을 보고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단지 아픔을 참으며 아들을 떠나 보내 잠시 출가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그런 후에 아티샤 존자는 또 아박도제 존자가 계신 곳으로 가서 매우 신심을 갖고 공경하고 정례(頂禮)하며 존자께 법문과 가르침,훈계를 간곡히 청했습니다.아박도제 존자는 아티샤에게 발심법을 전수한 후에 또 그에게 흑산사에 가서 또 다른 한 분의 요가사(瑜伽師)를 친히 만나 뵙고 오라 일러주셨습니다.이 대요가사의 이름은 나후라발다라(羅侯羅笈多)였으며,그 지방에서 아티샤 존자는 환희금강(歡喜金剛)의 관정(灌頂:밀교의식)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황궁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만나 뵙고 작별인사를 올리고 또 다시 아박도제 존자가 계신 곳으로 가서 수행을 하고 중관(中觀)을 배워 월칭파(月稱派)의 중관정견(中觀正見)을 얻었습니다.그는 아주 열심히 노력하여 불법의 교리(敎理)에 통달하였으며 21세가 되었을 때는 불법,세간법은 물론이고,내명(內明),외명(外明),인명(因明)모두 통달하여 굉장히 놀랄 만하게 되었습니다.그는 자주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 논쟁하여 이겼습니다.이로써 그가 교리에 통달하여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당시에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력이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정진을 쉬지 않고 배움과 실천이 일치하다

아티샤 존자가29세가 되었을 때,금강좌 마저비하라사(摩底毗訶羅寺)에서 지율상좌(持律上座)계호론사(戒護論師)가 있는 곳에서 정식으로 출가했습니다.그런 후에 2년간 논장(論藏)을 배웠고, 30세가 되었을 때에는 대중부(大眾部),상좌부(上座部),정량부(正量部),일체유부(一切有部),이 4대부파의 모든 삼장교전(三藏敎典)에 통달했습니다.각 종파별로 계율(戒律)측면에 있는 미세한 차이점,각 교파(敎派)의 다른 행지(行持:정진수행을 하여,불법의 계율을 지키다)에 대해서도 통달하였고 정통하였습니다.그는 일찍이 지가마라시라사(止迦摩羅尸羅)에 오래 머무르면서 나락파(那洛巴)에 의지(依止)했으며,또한 일찍이 비행사(飛行寺)의 법호존자(法護尊者)를 따르며 <비바사론(毗婆沙論)>을 12년간 배웠습니다.당시 외도의 일부 종파들 예를 들면 수론종파(數論宗派),승론종파(勝論宗派)등의 경전에도 모두 통달할 수 있었습니다.이러한 외도의 일부 논점은 <대장경(大藏經)>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티샤 존자는 인도에서 불법수행에 매우 깊이 파고 들어갔고 마음의 힘(功夫)이 대단했습니다.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현장(玄奘)법사처럼 그는 내외전(內外典)에도 아주 정통했으며 아주 어렸을 때 이미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일종의 영원히 만족하지 않는 정신,법을 구하는데 게으르지 않는 정신,모든 성교(聖敎)에 통달하고자 하는 정신을 갖고 있어 영원히 멈추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일찍이 세 번에 걸쳐 바다로 들어가 법을 구했습니다.

당시 금주(金洲)지역,즉 현재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에 법칭론사(法稱論師),법호존자(法護尊者)라고도 불리는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그분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주대사(金洲大師)입니다.아티샤 존자는 이 큰 스님을 숭배(崇拜)하여 금주대사께 의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당시 아티샤 존자는 125명의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13개월이 걸려 금주대사金洲大師의 거주지인 수마트라에 도착했습니다.금주대사는 아티샤 존자 일행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이로부터 12년 후 금주대사는 아티샤 존자와 함께 살며 조금도 남기지 않고 불법을 아티샤 존자에게 전수(傳授)했습니다.아티샤 존자도 매우 열심히 정진하여 수행하고 배웠습니다.특히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 <입보살행론(入菩薩行論)>등 수승한 가르침을 배웠습니다.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자신과 타인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것인 자타상환(自他相換)”의 보리심(菩提心)도 아티샤 존자가 모두 금주대사께 배운 것입니다.

아티샤 존자는 학습을 마친 뒤 인도로 돌아온 후에 벌써44세였습니다.그때 인도에서 4대 사찰인 나란타사,비행사,금강좌사,지가마라시라사가 있었습니다.아티샤 존자는 인도에 돌아온 후 먼저 금강좌사(金剛座寺)에 머물렀습니다.그런 후에 호법왕의 초청을 받아 지가마라시라사로 옮겨 상주하셨습니다.아티샤 존자의 명망이 아주 높았고,탁월한 재능을 가졌으며 불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존자는 그 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덕이 되셨습니다.당시 그 절 앞 오른쪽에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상이 그려져 있었고,왼쪽에는 아티샤 존자의 상이 그려졌습니다.이것으로 보아도 그 당시 인도에서 사람들이 존자를 용수보살과 비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 외에도 법당의 좌우 벽에 오명에 통달한 사람을 그렸고,좌우 양쪽에 아티샤 존자를 그렸습니다.그래서 절의 앞과 법당의 좌우 양쪽에 모두 아티샤 존자가 그려져 있었습니다.이는 당시 인도의 사찰들이 존자의 성취에 대해 모두 경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이는 아티샤 존자가 인도에서 학습,수행,성취,홍법에서의 공덕입니다.

4)존자가 티베트에 들어가자 이익이 심원(深遠)하였다

그렇다면 존자는 또 어떻게 티베트의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당시 티베트 지역은 랑다마 멸불(朗達瑪滅佛)을 겪은 이후에 불법이 쇠퇴했습니다.티베트 아리(阿裏)에 지광(智光)이라는 출가인이 있었는데,역시 왕족의 후예였습니다.그는 당시 티베트 불교내부의 의견이 분분함과 각종 불교의 이론 단서가 너무 많아 어떤 말이 옳은지 판단할 수가 없어 종종 모순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불교가 가장 왕성한 지역으로 가서 법을 구해야만이 불법의 이치에 어울리는 불법이 무엇인지,정신(正信的)의 불법이 무엇인지를 확정할 수 있으며,도대체 누가 하는 말이 요의(了義:불법의 이치를 완전하게 설명한 것)한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그는 7명의 지혜로운 법사를 파견하여 가습밀라(迦濕密羅)에 가서 학습에 참여하게 하고,또한 그들 모두에게 두 명의 하인을 붙여주어 모두 21명이 되었습니다.이 사람들이 출발하려고 할 때 지광존자(智光尊者)는 그들에게 법을 구하는 것 이외에 당시 인도의 고승 대덕을 티베트로 모셔와 홍법을 할 수 있도록 분부했습니다.

그들이 인도의 고승대덕을 티베트로 초청(迎請)하여 홍법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대체 어떤 큰 스님이 티베트에 와서 홍법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습니다.이런 큰 스님들은 불법교리(佛法敎理)방면에서 확실히 성취가 있어야만 하고 그 다음으로는 티베트에 와서 홍법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이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당시 티베트에서 간 이 21명은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연이어 19명이 사망했고 마지막에는 단 두 명만 남았습니다.한 명은 보현역사(寶賢譯師),또 한 명은 선혜역사(善慧譯師)였습니다.이 두 명은 티베트 아리(阿裏)로 돌아온 후에 불법을 배운 결과물을 지광존자(智光尊者)께 보고하는 이외에도 지광존자께 아티샤 존자가 아주 대단하며,성취가 있어 인도에서의 영향력이 매우 크고 대단하다는 것을 알렸습니다.이리하여 지광존자는 또 정진사자(精進獅子)를 인도로 파견하여 아티샤 존자를 모셔오려 했습니다.하지만 이번 정진사자가 아무리 청해도 아티샤 존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정진사자가 아리(阿裏)로 돌아온 후에 지광존자께 이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지광존자(智光尊者)는 또 다시 그들을 보내 아티샤 존자 밑에 있는 대덕들을 초청했습니다.비록 아티샤 존자는 오려 하지 않았지만 아티샤 존자 좌하(座下)의 사람들,존자의 도반들이 티베트에 와서 홍법을 하는 것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지광존자(智光尊者)는 고승대덕을 청하기 위해 많은 공양품을 모았습니다.하지만 그가 티베트 남부에 도착했을 때,불행히도 한 이교도(異敎徒)에 의해 잡히고 말았습니다.이 이교도는 국왕이었습니다.지광의 조카의 아들인 보리광(菩提光)은 많은 병마를 이끌고 지광을 구하러 왔고 그 국왕과 조건을 이야기했습니다.그 국왕은 지광을 데리고 가고 싶으면 지광의 신체와 동일한 금을 갖고 와야만 지광을 풀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보리광은 아리(阿裏)지역에서 대량으로 금을 마련했지만 사람의 머리 하나 만큼의 중량이 모자랐습니다.하지만 보리광은 그 만큼의 금을 가지고 국왕을 찾아가 지광존자를 풀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그 국왕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보리광은 감옥에서 지광존자를 만날 수는 있었습니다.지광존자는 보리광에게 “이 국왕은 외도를 믿고 있으니 그에게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말고 금도 줄 필요가 없으니 이 금을 가지고 아티샤 존자께 공양하라.”고 알려줬습니다.그는 자신은 법을 위해 기꺼이 몸을 버려 이교도의 지역에서 죽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보리광은 돌아간 후에 다시 금을 찾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광존자(智光尊者)는 입적(圓寂)하셨습니다.보리광은 계속하여 아티샤 존자를 모시는 신성한 큰 일을 이행하였고 열심히 정진하여 여러 방법을 생각해 내어 마침내 아티샤 존자를 티베트로 모시고 왔습니다.

이것은 아티샤 존자 이야기 중의 한 부분입니다.모두들 잘 아는 이야기일 것이라 믿습니다.특히 도차제(道次第)를 배우는 사람들은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그 중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하고 파악해야 하며,우리와 관계가 있고 귀감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먼저 이런 정신,즉 법을 위해 몸을 희생하는 정신은 불법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불법을 자기의 머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21명이 인도로 가서 고승대덕께 청하고 19명이 죽은 부분을 보면,과거에도 우리나라 한족지역(漢地)의 많은 법사님이 법을 구하러 인도로 많이 갔었습니다.이와 같이 “100명이 가서 돌아온 사람은 열명도 안되니 앞의 사람들의 어려움을 후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즉 일종의 앞 사람이 넘어져도 뒷사람이 그 뒤를 이어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헌신적으로 분투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이로써 우리는 불법을 듣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티샤 존자는 아주 어렸을 때에도 이처럼 선근이 있었습니다.배운 것이 많고,아는 것이 많았지만 여전히 부지런히 탐구했습니다.우리처럼 이렇게 조금 배워놓고 충분하다며 배우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조금 배워놓고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느니 조금 배워놓고 더 이상 다른 것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불법은 스스로 깨우치고 타인을 깨우치는 것이다

1)마음을 키우는 힘

우리가 범부의 자리인 범부위(凡夫位)에 있을 때,하나는 하나고,둘은 둘이고,셋은 셋이었습니다.성소득위(聖所得位)에 있을 때 아마도 하나는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하나는 아마도 모든 것일 것이며,모든 것은 아마도 하나일 것입니다.즉,불법의 도리는 만사 만물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불법의 도리는 만법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만일 불법의 도리를 우리가 철저히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면 반대로 일종의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법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든,불업을 듣고 생각하는 것이든,우리가 들은 불법을 마음속에 담는 목적은 번뇌를 없애고 무명을 없애기 위함입니다.내면이 나날이 청정해지고 나날이 밝아지고 지혜로워져서 외재적인 사람,일,사물,그리고 환경에 대한 관찰력이 나날이 강해지고 나날이 예리해지며 민감해지고 내면의 힘도 나날이 강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내면의 힘이 강함은 어디에서 구현될까요?바로 그 사람이 포용심이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즉,우리 는 내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우리 내면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

보살도는 “위로는 법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위로는 불도를 구한다.이 불법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삼보,부처님,모든 선지식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불법이 우리에게 온 이후에 우리가 그것을 사용합니다.어디에 사용합니까?중생들을 위해서 사용합니다.중생에 사용한다는 것은 당연히 자기에게 사용하는 것도 포함되며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도 포함됩니다.이렇게 해야만이 비로소 불법이 유용한 것입니다.불법을 나에게만 쓰는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불법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달은 후에,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합니다.“이 불법을 네가 알게 되면 내 것이 줄어든 것 같으니 네가 모르게 해야겠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육도(六度)의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불법은 바로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며,우리가 주동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반대로 중생이 어떤 불법이 필요하면 우리는 그가 어떤 도리를 들어야 하는지 그의 상황에 맞게끔 알려줄 수 있습니다.그가 어떤 도리를 들어야 하는지 우리는 딱 맞는 가장 적합한 인도를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동안 불법을 배운 이후에도 왜 더욱더 공허하고 더욱더 두서가 없고,불법을 얻지 못한 것 같이 느껴지는 걸까요?이는 우리의 배우는 방법에 문제가 있거나 우리의 발심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불법은 힘과 같아 당신이 오늘은 힘이 있지만 내일까지 저축은 할 수 없습니다.당신이 오늘 그 힘을 써도 내일 또 똑같이 힘이 있습니다.게다가 내일의 힘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오늘 그 힘을 쓰지 않고,내일도 쓰지 않고 이번 달에도 쓰지 않았는데 그 다음 달에 힘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이는 불가능합니다.여러분이 힘을 숨겨놓고 쓰지 않으면 다음달에 그 힘은 오히려 더욱더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불법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그것은 내면을 키우는 하나의 힘이고 이런 힘을 더욱더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2)불법을 받아들여 업(業)을 이루라

우리가 부단히 법을 쓰고 부단히 만들어야만 비로소 법을 받아들이고 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법을 받아들이고 업을 이루다”는 무슨 의미일까요?바로 법을 마음에 받아들여 마음이 몸과 말을 통해 만들어지고,그것이 비로서 업을 이룬다는 것입니다.만일 몸과 말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고,우리가 법을 마음속에만 받다 들인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생각하는 업인 사업(思業)에 불과합니다.몸과 말을 통해 만들어져야만 비로소 몸과 말의 업으로 변할 수 있으며,그런 후에 비로소 업과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불법 한 마디를 듣고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생각한다면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매일 그곳에 앉아 생각한다면,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명확해질까요?불법은 실천이 필요합니다.소위 “실천”이란 바로 경계와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어떤 사람들은 “내가 경계를 마주했을 때 내면이 혼란하고,일을 할 때 내면이 어지러워서 경계를 마주했을 때 불법을 생각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여러분이 방안에 혼자 있을 때,경계를 마주합니까?여러분은 마찬가지로 경계를 마주합니다.어떤 경계를 마주할까요?방안에는 많은 물건이 있습니다.예를 들어 텔레비전,책,의자,장롱,탁자…이러한 것들도 역시 우리가 볼 수 있는 경계입니다.비록 방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벽이 있고 여러분은 그 벽을 볼 수 있으며,귀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그때는 아마도 모기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파리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경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경계가 있고 없고는 다 우리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3)고요함,깨우침,자율

반대로,우리가 정(靜)의 상태 즉,가만히 있을 때 정말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가만히 있을 때 우리 마음은 무슨 상태이며,어떤 경계일까요?그런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것을 정(靜)이라고 부릅니까?어떤 사람들은 경계를 마주하지 않고,경계를 멀리하는 것을 정(靜:고요함)과 정(定:편정하다)이라고도 부릅니다.이것은 진정한 정(靜)과 정(定)이 아닙니다.정(靜)과 정(定)의 힘은 우리가 어떤 경계와 만날 때 내면이 어지러워지지 않고 혼침(昏沈)하지 않고,산란(散亂)하지 않고,도거(掉擧)하지 않고,각종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우리는 많은 것을 봤으며,들었으며,너무 많은 다른 사물을 생각했기 때문에 내면은 쉽사리 굳건해질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아주 집중적인 경계와 닿아야 우리의 내면을 고요하게 할 수 있입니다.“고요(寂靜)”의 뜻은 바로 우리의 기심동념(起心動念: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임)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하고 예리하게 알아야 합니다.자기가 현재 어떤 마음이 일고 있는지 어떤 생각이 들고 있는지 다음 생각은 다시 어떻게 일게 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이런 것에 대해 아주 명확하면 깨우침이 참으로 강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깨우침의 힘이 없고,자아각성(自我覺察),자숙(自我約束),자율(自律)의 정신과 힘이 없다면 그것은 모두 불법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자각자율의 행위가 없는 것은 모두 불법과 거리가 있고 심지어 서로 위배된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자각성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우리가 자율 정신이 없다면 말하는 것을 자기도 할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인들 하겠습니까?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불법은 바로 깨달음입니다.먼저 스스로 깨우쳐야만 다른 사람을 깨우칠 수 있고,그런 후에야 스스로와 다른 사람 모두 원만해지고 성불하여 나를 깨우치고,남을 깨우쳐 자각각타(自覺覺他)하고 깨우침과 행함이 원만해지는 각행원만(覺行圓滿)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자율은 또 어디에서 표현될까요?깨우친 이후에 행위에는 규범이 있습니다.행위에 규범이 있다는 것은 바로 어떤 때이든지,무슨 일을 하든지 매우 명확하다는 것으로 이 시공 인연(時空因緣)하에 자기에 대한 모든 행동이 명확해야 비로소 성취가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성취가 있기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실재적인 업을 만들지 않고,용맹정진(勇猛精進)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결과가 아주 작고 심지어는 결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이는 분명합니다.

3.연기(緣起)를 잘 관찰하고 업보를 깊이 믿으라

1)연기의 도리

연기(緣起)의 도리는 바로 부단히 새로이 조합하는 것입니다.조합하면 할수록 좋아지고 하면 할수록 청정해지며 커집니다.불법이 외도와 다른 점이 바로 연기법입니다.외도의 법은 무엇입니까?주재법(主宰法)입니다.어떤 사람 혹은 어떤 신이 만물을 주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불법은 연기법(緣起法)이지 주재법이 아닙니다.소위 “연기법(緣起法)”이란 바로 바꿀 수 있고,무상하며 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무상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번뇌를 끊어낼 수 있습니다.만일 연기법(緣起法)이 아니라면,변화할 수 없다면,번뇌는 영원히 번뇌이며 보리는 영원히 보리이고,범부는 영원히 범부일 것입니다.

모든 법은 무상(無常)하고,모두 무아이며(無我),모두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이런 변화과정 속에서도 규율성이 있으며,무질서하지 않는 것입니다.우리가 만일 좋은 측면으로 변화하고 좋은 측면으로 가고,깨달음의 길을 따르고 보리의 차제대도로 따라 간다면 이는 옳은 것입니다.반대로 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이런 관점은 우리 마음속에서 나날이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만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방금 말한 것처럼 배우면 배울수록 흐릿해지고 법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법을 받아들여 업을 이루지 못하고 법의 진정한 함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2)귀의 업과(業果)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을 널리 제도하기 위해 우리에게 많은 불법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우리가 제도를 받고 생사를 해탈하고,원만한 불과를 이루려면 구제(得度)의 인연을 심어야 합니다.이래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제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즉,이 인연을 우리 스스로가 가서 심어야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부처님은 우리가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어떻게 해야만 아주 빨리 성불할 수 있는지,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게 되는지 어떻게 하면 소,말로 변하는 축생도(畜生道)로 가게 되는지,어떻게 하면 후세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지,이는 무슨 인(因)인지,무슨 연(緣)인지,무슨 과(果)인지,무슨 보(報)인지,무슨 정경(情景)인지,정보(正報)가 무엇인지,의보(依報)무엇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묘사하여 알려주셨습니다.모든 업과의 원리,즉 세간의 업과,출세간의 업과,범부의 업과,성자의 업과에 대해 낱낱이 완전하게 하나도 남김없이 알려주셨습니다.그 목적은 바로 우리가 악을 끊고 선을 수행하여 범부에서 성자로,번뇌에서 보리로 바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과정 중에 어떤 문제가 나타납니까?호기심이 발생합니다.우리의 전생은 어땠을까?내세는 어떻게 될까?다른 사람의 전생은 무엇이고 내세는 어떨까?나는 무슨 인연으로 어떤 과를 얻는가,어떻게 해야 길함을 추구하고 흉함을 피할 수 있을까,어떻게 해야 고통을 적게 받을 수 있을까,어떻게 해야 재난을 없앨 수 있을까 등을 궁금해합니다.물론 이것이 완전히 잘못됐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불법이 함유하고 있는 목적과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불법은 우리가 호기심을 일으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또한 우리가 길함을 추구하고 흉함을 피하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흉함은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그것은 인과입니다.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좋은 일을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세간의 사람들은 길함을 추구하고 흉함을 피하는 것,재난을 피하는 것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재난을 피하는 것이나 길함을 추구하고 흉함을 피하는 것은 모두 업과(業果)입니다.즉 업과(業果)에 대한 도리를 진정으로 통달한 이후에 우리는 비로소 재난을 피할 수 있고 흉함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부처님께서 우리가 재난과 흉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기만 하고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의 모든 행동이 길함을 추구하고 흉함을 피하고 재난을 피하려는 요구와 규범에 부합해야만이 진정으로 길함을 추구하고 흉함을 피할 수 있습니다.내가 지금 문제가 많고 고통이 많고 골칫거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살과 부처님에 의지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여러분이 매일 생각해도 부족합니다.부처님은 바로 우리에게 이렇게 해야 하고,그렇게 하지 않아야만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려 한 것입니다.우리는 이 도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만일 우리가 부처님을 단지 우리를 보우해 주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얻게 해주시고,우리에게 큰 이익을 주시는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모르는 사이에 부처님을 다른 신과 혼동할 수 있습니다.만일 부처님이 이런 능력이 있으시다면,우리는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이 즉시 성불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부처님이 갖고 계시다면,중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중생들이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불법을 가르치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불법에 대해 명확히 인식해야만 합니다.불법이란 도대체 무엇인지,자기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은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함인지?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일년,이년,삼년,사년,심지어 몇년이 흘러도 불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낯설고 요원할 것입니다.

아티샤 존자가 티베트에 와서 귀의(歸依),업과(業果)를 말씀하셨습니다.귀의는 세간과는 다릅니다.세간의 모든 일체는 진성이 오염된 것이고 모두 세간법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완벽하게 완전하게 삼보에 귀의하여야 합니다.귀의한 후에는 인과(因果)를 믿어야 하며,먼저 무엇이 인과인지,어떤 인이 어떤 과를 불러오는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우리가 어떤 과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 과를 얻을 수 있는 인(因)을 심어야 합니다.우리가 얻기 싫은 과는 그 과를 불러오는 인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만일 우리가 한편으로는 불과를 얻고 싶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인(因)을 만들면 이것으로 어떻게 불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그런 후에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이렇게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부처님께 해결해 달라고 하면 이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오랜 기간 관찰해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배워도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 내리지 못 하고 중심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성실하게 원칙대로 보리도에 이르는 차제인 도차제(道次第)에 근거하여 일을 하고,수행을 해야 합니다.삼보에 귀의하여 우리가 스스로의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믿음이 있어야 자연스럽게 우리도 불법에 가까워 질 것입니다.불법이 내면에 뿌리를 내리면 우리의 번뇌도 없어질 것입니다.불법의 힘이 생겨나지 않고,선법(善法)이 생겨나지 않으면 마음속은 아마도 악법(惡法)으로 가득할 것입니다.악법(惡法)은 현재,미래에 모두 크나큰 근심을 남길 것이 확실합니다.모든 바깥의 부처님,삼보는 우리가 수행하는 하나의 경계입니다.이것은연법(緣法:마음을 불법에 두고 하는 것)의 대상으로서 수행하는 것은 아주 강하고 큰 선법(善法)의 경계,청정한 경계에 의지해야만이 비로소 내면의 어두움,번뇌를 떨쳐버릴 수 있는 방법이 생깁니다.즉,이 경계를 빌어 우리의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일 우리가 청정한 경계를 보고 잘못을 따지면우리 내면의 장애,무명이 이미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우리는 이렇게 문제를 인식하고 자기의 마음을 인식해서 우리 내면의 무명 번뇌의 먼지를돌파(突破)해야만이 지혜,광명이 비로소 조금씩 조금씩 증가하고 자랄 것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을 축원합니다. 

편집:설원춘
태그:아티샤 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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