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생명의 귀인을 찾자

Author:쉬에청 큰스님     기사입력:2016-07-04 12:52:32
2006년 12월 3일 오전, 쉬에청(學誠) 큰스님은 몇 백 명의 신도들에게 귀의를 전수하셨습니다.법당에 빈 자리가 없이 곽 찬 가운데 큰스님께서 <생명의 귀인을 찾자>라는 주제로 법문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신도에게 출가인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우리는 귀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보살도(菩薩道)를 수행하자

1)부처님이 행한 그대로 행하라

우리가 불법을 배우면서 보살도를 행하는 것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합니다.보살이 걸어가는 길은 우리 일반인이 걷는 길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보살이 가는 길을 보리도라고 부릅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목적은 성불하기 위해서입니다.보살이 수행을 하고 발심을 하고 보살도를 행하는 것 그 목적 또한 성불하기 위함입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성불하려면 먼저 보살이 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그것은 바로 보살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우리도 그것을 따라 하고 보살이 어떻게 수행하는 지를 보고 우리도 수행해야 하며,보살이 보리심을 내면 우리도 따라 보리심을 내야 합니다.보리심은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보살도도 수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배우기 쉽지 않고,발심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씩 천천히 배우고 수행해야 하며 발심하는 것을 배워서 하나 하나씩 배우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며 매일 매일 배워야 합니다.우리가 절에 와서 불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이런 내용을 배우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법에 따라 수행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이는 바로 단순히 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도리에 근거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도리에 근거하여 수행을 한다는 것입니다.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도리에 근거하여 수행을 하면 어려움이 많고,문제도 많을 것입니다.우리는 불교 도리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고 깊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심지어는 편차나 잘못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오직 부처님이 알려주신 도리에 근거해야만이 비로소 정확하고 원만할 수 있습니다.

2)아티샤 존자와 <보리도거론(菩提道炬論)>

아티샤 존자가 티베트에서 아주 뛰어나고 높은 성취를 이루었음을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그 당시 보리광(菩提光)은 아티샤 존자께 티베트에 가시는 것을 청하여 체계적이고 완전한 불법을 티베트에 들여와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당시 티베트의 실제상황에 근거하여 아티샤 존자는 <보리도거론>을 지었습니다.이 논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보살도의 도리를 어떻게 배우고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이 책이 티베트에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요?그 원인은 바로 그 당시의 티베트가 멸불(滅佛),즉 랑달마(朗達瑪)멸불(滅佛)을 겪었기 때문입니다.랑달마 멸불의 과정 중에서 거의 1백 여 년의 시간 동안 출가인이 나오지 않았으며 불경이나 불상도 없었습니다.단지 소수의 환속인(還俗),소수의 거사들의 입으로 서로 전해졌으며 대부분은 일부 비교적 간단하고 짧은 주문만이 전해졌습니다.티베트에서 랑달마(朗達瑪)멸불(滅佛)발생했을 때는 당나라 시대로 “당무종 멸불(唐武滅佛)”의 기간에 해당합니다.한족지역(漢地)에서 당무종 멸불(唐武滅佛)발생한 후로 선종(禪宗)이 성행했습니다.그 이유 또한 많은 경전이 소각되어 출가인,거사들이 불경을 볼 수 없어 산 속에서 좌선을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티베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많은 불교 신도들이 불경을 볼 수 없어서 매일 주문만 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하지만 주문을 외우는 과정 중에 불교적 내용이 아닌 것이 많이 섞여 들어갔습니다.그래서 아티샤 존자가 티베트에 갔을 때 이 논저를 만들어 당시 티베트 불교가 갖고 있던 많은 문제점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아티샤 존자는 일생 동안 수행에 집중하고 불법을 가르쳐 널리 펼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예를 들면 방금 말한 <보리도거론>같은 것으로 아주 좋은 저서입니다.

3)출가승,불법,도반을 따라 수행하라

우리가 보살도를 수행하는 목적은 바로 우리에게 내재한 번뇌,내면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내면의 번뇌를 어떻게 깨트릴 수 있을까요?오직 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지혜를 인식하고 늘려갈 수 있을까요?그것은 바로 불법을 공부해야만 합니다.불법은 어떻게 공부할까요?한편으로는 경률론(經律論)의 문자에 근거하여 배워야 합니다.우리가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인 삼장(三藏)의 경문,문자를 배우는 것은 경률론(經律論)중의 뜻과 내포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입니다.하지만 우리의 기초조건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선지식,출가하신 법사님께 배워야 합니다.출가한 법사님은 공부를 하신지 비교적 오래되고 긴 시간을 배우셨기 때문에 경문에 대한 깨달음이 비교적 깊으며 이해가 좀 더 정확하고 좀 더 깊지만 이제 막 불법을 배우기 시작한 우리는 이해가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는 절에서 불법을 공부한지 오래 되신 법사,수행 도반이 아주 간단하게 말하지만 깊은 뜻을 갖고 있는 것을 자주 접합니다.왜 말은 간단한데 뜻은 심오할까요?이 시각에 이 말이 여러분에게 아주 유용하고 도움이 되며 여러분 자신의 현재 문제와 서로 관련 없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만일 우리가 하는 말이 여러분의 눈 앞의 실제 상황과 관련이 없다면 이 간단한 말은 바로 아주 간단하고 심지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로 변합니다.반대로 만일 아주 간단한 언어로 불법에 내포된 뜻을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법은 일상생활 가운데 있습니다. 언어,문자는 모두 성현의 도를 설명하는 (載道)도구이며 현재는 언어가 아주 풍부하여 더욱 그러하다 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우리도 이런 언어,문자를 빌어 불법을 전수하고 불법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이런 언어 문자를 통해 우리는 정신 교류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고 모두가 출가법사가 마음속으로 깨달은 일종의 경계와 느낌,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만일 이런 언어 문자가 없었다면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우리 같은 사람은 공부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절에 와서 한편으로는 출가하신 법사님과 수행 도반을 따라 배우고 또 한편으로는 경론을 바탕으로 배우니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내면의 무명 번뇌를 깨뜨리고 우리의 지혜와 내면의 계정혜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입니다.

2.스승을 따라 수행하라

1)마음 속 먼지와 때를 씻어내라

절에서 우리는 일상적인 업무를 자주 합니다.예를 들면 이곳에서 봉사자가 되어 청소를 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절에서 청소를 하는 것은 거리에서 청소를 하는 청소부들이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길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들은 단지 돈을 버는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한 구간을 맡아 시간이 되면 매일 쓰레기를 치우는 그 사람의 목적도 바로 돈을 벌기 위함일 뿐입니다.우리가 절에서 청소를 하는 것은 단지 외부의 쓰레기를 치우기 위함일 뿐 아니라 더욱 주된 목적은 외부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을 통해 우리 내면의 쓰레기를 치우고 내면의 무명의 먼지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 내면의 무명 먼지는 각종 번뇌,각종 아애집(我愛執)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탐착(貪著:만족할 줄 모르고 사물에 대한 집착함)입니다.예를 들어 우리는 아주 주관적으로 세간의 많은 일에 미혹되고 미련을 가지며 탐착하거나 아주 흥미로워 하기도 합니다.이 모든 것은 일종의 집착에 대한 표현입니다.불법을 배우는 우리는 이런 집착,이런 얽매임을 부단히 끊어내야 합니다.왜 우리는 그렇게 많은 고통을 갖고 있을까요?바로 우리가 그리도 많은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고,추구하는 것이 모두 세간의 “나”라는 존재와 관계가 있는 경계이며 일련의 일들입니다.이런 일들,이런 경계는 모두 세간법이며,모두 생사 윤회의 현상일 뿐입니다.

2)생명중의 귀인

오늘날 우리는 사람의 몸을 얻었습니다.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사람의 몸을 받는 업을 지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하나의 과보신(果報身)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우리가 얻은 과보의 몸을 인간이라 이름합니다.우리는 한 생애에서 어떻게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해야만 할까요?어떤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가장 의미 있고 가장 가치 있는 것일까요?어떻게 해야 비로소 가장 의미 있고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언제 해야 하고 언제 시작해야 할까요?이런 문제는 모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합니다.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 자기도 따라서 그렇게 합니다.사회에서 첨단을 걷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자기도 따라서 그렇게 합니다.

불법을 배우는 우리는 전혀 다릅니다.반드시 가장 성취가 있고,가장 성과가 있고 가장 지혜가 있는 사람을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의 기준으로,공부와 모방의 대상으로 삼아야만 합니다.즉,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 일생의 학습 목표,추종의 목표로 삼느냐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먼저 우리는 세간의 어떤 사람이 가장 중요한지를 이해하고 알아야 합니다.사람의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그 답안도 천 가지,만 가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 신도에게는 출가인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우리 불교신도의 목적은 바로 불법을 배우고 성불하려는 것입니다.출가인은 불법에 따라 실천하는 사람이고 일생 동안 모든 몸과 마음으로 불법을 완전히 실천하는 사람입니다.그래서 불법을 배우는 우리에게 출가인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우리는 귀의를 해야 합니다.만일 우리가 귀의를 하지 않는다면 불법을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귀의를 한 후에는 출가하신 법사님이 우리에게는 귀인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다.우리가 귀의 한 후에,출가하신 법사님,승단(僧團)를 우리가 공부하고 추종하는 귀감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출가하신 법사님이 어떻게 하시는 지를 보고 우리도 따라 해야 하며,법사님이 알려 주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 해야 합니다.

3)생명은 불법을 떠날 수가 없다

불법을 배우는 우리는 언제나 불법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시시각각 불법으로 우리 내면을 정화하고,불법으로 우리의 신(身),어(語),의(意)삼업(三業)을 이끌어야 합니다.오직 우리 내면에 불법이 있어야 만이 진정으로 불법을 배운 것입니다.만일 우리 내면에 불법이 없다면,일상생활에서의 행동에 불법이 나타날 수 없고 불법과 서로 관련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불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이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우리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발심하고 발원하여 무엇이 진정한 불법인지,자기가 어떻게 공부해야 하며,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비로소 불법을 더욱더 잘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공부하면 할수록 하루 하루 진보할 것입니다.물론 현세의 성취도도 높아질 것이고 훨씬 진일보하여 후세에 우리의 과보,우리의가만(暇滿:여유와 원만함)은 더욱 나아지고 더욱 수승해질 것입니다.만일 우리가 이 생에서 아주 얻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여전히 세간의 윤회에만 쓴다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업을 짓는 것에 몰두하여 끊임없이 고통을 받습니다.현재 고통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도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현세에서 고통을 받고 내세에서도 여전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만일 이 명제에 대해 우리가 깊은 이해를 하고 있다면 자기의 생명은 불법을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3.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다

1)삼보의 공덕을 체득하다

“자기의 생명은 불법을 떠날 수 가 없다”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의 생명이 이미 완전히 불법을 받아들여 불법이 이미 자기의 내면과 융합되었다는 것입니다.만일 우리 마음속에 불법이 있고 불법의 작용이 있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언행이 모두 불법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하늘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사계절이운행되고 만물이 자라고 있는데,하늘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푸른 하늘은 아무 말이 없지만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변화,하루 또 하루,한달 또 한달,일년 또 일년 만물은 생명을 얻어 성장할 수 있으니 푸른 하늘이 자기의 공로와 기능이 얼마나 큰지를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만일 푸른 하늘이 없다면,사람이나 생물,초목은 모두 존재할 수 없습니다.이 모든 세계가 하늘의 포용과 보호아래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배우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우리의 행동이 왜 그렇게 힘이 있을까요?왜 우리가 그런 즐거움을 느낄까요?그 원인은 바로 우리가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기 때문입니다.부처님은 푸른 하늘과도 같습니다.비록 우리의 업장의 깊고 무거움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런 작용을 느낄 수 있습니다.우리는 삼보의 수승한 공덕과 사찰의 청정하고 장엄함을 느낄 수 있고 체득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체득하려면 온 마음으로 열심히 체득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남을 이해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인자는 사람을 좋아하고,지자는 사람을 안다”라고 하셨습니다.그 의미는 인의(仁義)가 있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소중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자신의 친척이나 친구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소중히 하고 아낀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을 좋아합니다.지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능합니다.다른 사람을 이해해야만이 다른 이의 요구,문제,어려움,번뇌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며 또한 길고도 먼 과정입니다.우리는 평상시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원망하며 자기가 하는 많은 행동들을 다른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늘 오해를 산다고 느낍니다.우리는 늘 자기는 다른 사람의 일을 잘 이해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처세,다른 사람의 학습과 수행 노력을 잘 이해한다고 여깁니다.실제로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있습니까?만일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언제 그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할지,언제 어떻게 그 사람을 도와야 할지,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불법을 더 잘 배우고 삼보를 아끼고 보호하고 발심을 하게 할지 마땅히 알 것입니다.마치 우리가 이 강당 안에 있으면서 이 강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강당에 들어올 때 향을 어디다 두어야 하는지,초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전등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문은 어디에 있는지,창문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어서 질서정연할 것입니다.이것은 단지 환경에 대한 이해,물품에 대한 용도,성능에 대한 이해입니다.사람,사람의 마음,인성,업과 등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우리는 그렇게 큰 도량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한 절에 살거나 한 직장 내에 살고 있어도 몇 년 동안 상대방의 이름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아파트에 살면 몇 십 년을 살아도 위층,아래층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도 모릅니다.현대인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고자 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기도 원하지 않습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특징들입니다.혹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3)남을 이롭게 하자

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있는데 불법의 이익은 어디에서 얻나요?한편으로는 부처님으로부터 경험과 가피를 얻고,또 한편으로는 중생들에게서 얻습니다.즉,불법을 실천하는 과정 중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노력,우리가 한 발심,우리가 지은 업으로 인해 불법의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이런 중생이 바로 우리의 홍법 대상이자 발심의 대상,우리가 이롭게 할 대상입니다.만일 이렇게 고난한 중생들이 없다면 우리가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비교적 문제가 많고,어려움이 있고,번뇌가 무겁고 고통이 많은 사람이 바로 우리가 발심하여 이롭게 할 대상이며 보살도를 행하는 대상으로 지금 우리가 노력하여 도와주어야 할 대상입니다.우리에게는 이 시간이 바로 첫 번째 시간으로 가장 중요한 시간,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남을 돕고 남을 이롭게 하는 과정 중에 “좋은 사람에게 좋은 보답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왜 좋은 사람에게 좋은 보답이 없을까요?좋은 일을 했는데 어떻게 좋은 보답이 없는 걸까요?원인은 바로 당신이 돕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을 받지 않아서입니다.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그 원인은 어디에 있나요?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때 효과가 없고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는 것인가요?제 생각에 이것은 우리가 발심하여 검토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원인은 바로 우리의 자비심,지혜,방편(方便:부처님이 중생을 여러가지 제도하는 방식)과 선교(善巧:부처가 사람을 제도할 때,교묘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이익을 줌)가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의 힘(功力),중생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마치 한 사람이 병이 난 것과 같이 아주 많이 아픈데 의사인 우리가 의술도 부족하고 약의 품질도 아직 좋지 못해서 눈 앞의 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도 같습니다.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경계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우리가 불법을 배운 이후에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이 전부 좋은 사람들이라거나 만났던 사람이 모두 우리 눈에 익고,우리의 관심과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과정 중에도 여전히 수 많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경계와 사람과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심지어 수많은 예상 밖의 어려움과 문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이때에 바로 번뇌를 인식하고 번뇌를 다스리는 능력을 부단히 키워내는 것이 필요합니다.사람은 번뇌가 있을 때 거칠고 사나운 번뇌를 비교적 쉽게 볼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당신을 욕하고 때리고 성질을 내고 하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하지만 만일 어떤 사람의 번뇌가 아주 미세하면 알아채기가 쉽지 않아 볼 수도,발견해 낼 수도 없다고 해도 실제로 이것도 일종의 번뇌입니다.예를 들면,우리가 절에서 일을 할 때 아마도 어떤 한 가지 일만 하게 되거나 혹은 한 가지 일만 하고 싶어합니다.그러나 법사가 다른 일을 하라 하시면 이때 우리의 마음 속은 순탄하지가 않고 심지어 불만이 생깁니다.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시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식해야 할 한 문제입니다.

4.법사님을 따라 실천하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

1)법사님을 따라 자신의 나쁜 습관을 고치자

우리는 사회에서나 집에서나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기어코 하지 않을 것 입니다.이런 습성은 아주 무겁습니다.절에서는 달라집니다.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때가 자기의 습관과 마주치는 좋은 때입니다.만일 우리가 여전히 자기의 습관대로 행동하고 일을 하면 이런 습관은 계속 커져갈 것입니다.만일 우리가 이런 습관을 거슬러 일을 하면 곧 습관을 다스리는 것입니다.비록 아주 고통스럽고 쉽지 않겠지만 이것 또한 우리가 또 다른 방면으로 능력을 키워나가는 때입니다.만일 우리가 이렇게 인식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또 다른 발심입니다.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며,다른 사람이 배정한 일이 합리적이지 않고 나에게 시키는 일이 이치에 잘 맞지도,법에 맞지도 않는다고 자주 생각합니다.우리는 절에 와서 이 모든 것을 온 마음으로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이른바 “이치에 맞는다”는 것은 자기가 불법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그런 도리가 자기의 행위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이치에 맞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도리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우리의 불법의 도리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법사가 우리에게 말씀 해주시는 도리나 우리를 위해 내리시는 결정도 아주 원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우리 자신보다는 더 정확하고 더 깊이가 있을 것입니다.이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만일 우리가 전체적으로,근본적으로 볼 때 법사의 이해가 우리보다 정확하다고 믿고 우리가 그대로 따라 가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만일 이렇지 않다면 우리가 불법을 배운 후에문제가 더 많아질지도 모릅니다.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우리는 쉽게 불법이라는 개념과 일련의 도리를 이용하여 자기를 포장합니다.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도리를 한바탕 늘어놓습니다.하지만 이때 우리의 내면 상태 혹은 경계와 우리가 말하는 도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도리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주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그들은 내면의 경계에서 이런 어려운 국면을 돌파하거나 내면의 이런 경계에서 힘쓰지 못하며,외부의 인연,외부의 경계를 맞닥뜨렸을 때 자기를 위해 설명하고 해석할 또 다른 도리를 이야기 할 것입니다.이렇게 하는 것은 불법을 배우는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이 점은 아주 미세한 것입니다.그래서 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좋은 스승과 이로운 벗을 얻고자 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평상시에 일이 없을 때 경전을 들고 독송을 하고,토론을 하고 체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등도 아주 좋기는 하지만 이것은 앉아서 탁상공론을 하는 것입니다.진정으로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런 불법을 진정으로 실천하고 체현하려면 오랜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실천해야 합니다.“모든 것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경지가 되어 유정물을 이롭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마음의 힘입니다.진정한 마음의 힘이 없이는 해낼 수 없습니다.

2)바로 그 순간,매일 매일을 잘 보내자

부처님은“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이언제 어디서든자연스럽게생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任運无間,饒益有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일을 끝낸 후, 너무 피곤해 다음에 다시 그 일을 할지 말지에 대해 고려할 것입니다.우리가 법회를 한번,두 번 참가하고,수업을 한번,두 번 들을 때 마다 크나큰 동력이 생겨나지 않습니까?의요(意樂)도 그만큼 강해지지 않나요?이 모든 것은 일정하지 않은 것입니다.불법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신선하게 느껴질 것입니다.불법도 신선하고,절의 환경도 새롭고,법사님들,수행 도반,여러분 서로가 낯설고 새로운 친구가 되어 예의를 차립니다.하지만 시간이 오래되면 서로간에 알게 되고 익숙해져서 또 다른 마음상태가 됩니다.“개의치 않는” 이런 마음이 나타납니다.우리가 불교를 배우기 전,아직 귀의하기 전에 있던 그런 상태가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런 사람들도 별로 대단하지 않다거나,절에서 하는 일이 집에서 하는 일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심지어는 절보다 집이 낫다는 등등의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이와 같은 바르지 않은 집착인 사집(邪執)도 나올 수 있습니다.이는 모두 현생의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지,어떤 일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지,우리가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모른다면,지금 실제로 만들어 내는 것이 없고,그러면 지금을 헛되이 보내는 것입니다.매 순간을 헛되이 보내면 매일을 헛되이 보내는 것입니다.그래서 불법을 배우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야만 하며,누구와 함께 일해야 하는지,어떻게 이 일들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며,내면이 매우 굳건해야만 합니다.무엇을 일컬어 정견(正見)이라고 하나요?무엇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하나요?우리가 일을 명확하게 인식하여 이런 명확한 인식에 비추어 사고하고 행동하여 그것을 해내고 잘 하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불법을 몇 년간 배웠다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아닙니다.이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몇 년간 배웠다는 것은 단지 시간을 대표하는 것으로 우리의 성적이 얼마나 좋다는 것과는 다릅니다.그것은 별개의 일입니다.세상 사람들이 70~80살까지 살았다고 그 사람이 지혜가 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물론 그 사람도 많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자신의 경험을.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을 비교해보고,큰 성과를 이룬 사람,지혜가 많은 사람의 경험과 비교해보고,부처님,조사대덕들의 경험과 비교해봅니다.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며 비교할 만한 성질을 갖춘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공부를 함에 있어 성실하게 본분에 따라 공부를 해야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비교하게 되면 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땅 위의 진흙을 어찌 황금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재료 자체가 다르니 절대 같지 않습니다.우리 같은 범부는 자기의 진정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자기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고 어떻게 발심을 해야 하는지,어떻게 동력을 키워야 하는지를 인식해야 합니다.이 모든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5.연기(緣起)를 파악하여 고통을 벗어나고 즐거움을 얻자

1)불교의 근본

연기법(緣起法)은 불교의 근본입니다.연기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바로 “화합”입니다.사람과 사람의 화합,일과 일의 화합,사물과 사물의 화합입니다.즉 모든 사람,일,사물이 모두 규범적입니다.예를 들면 법당안의 불상,탁자,방석을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고 가장 규범적인지,이는 사물과 사물의 화합입니다.또 사람이 사물과 화합하려면 줄을 맞추고 앞뒤 좌우를 가지런히 하는 등등 잘 정리하여야 합니다.우리가 하는 일도 화합해야 합니다.법사님을 모시고,찬송하고,성인을 모시고(請聖),참회하는 일등을 합니다.법당 안에서 우리는 경전을 읽고 법문을 들으며 예불을 하고,불법과 관련된 일을 이야기 합니다.이렇게 우리가 법당 안에서 하는 일들이 바로 이 장소와 부합하는 것입니다.만일 우리가 법당 안에서 다른 일을 하면 화합하지 않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수다를 떨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은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2)모든 감각(受)이 다 고통이다

어떻게 하면 연기법(緣起法)의 화합을 깨달을 수 있나요?무엇을 연기법이라고 부르나요?이 법은 또 무엇인가요?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나요?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사람은 모두 느낄 수 있습니다.우리가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느낌은 3가지가 있습니다.하나는 고통의 느낌,즉 우리가 늘 말하는 “고고(苦苦)”입니다.하나는 즐거움의 느낌,즉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괴고(壞苦)”입니다.이 즐거움은 지나갈 수 있습니다.또 하나는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즉 느낌을 버리는 것(舍受)입니다.이것은 “행고(行苦)”입니다.세상의 모든 느낌 혹은 모든 고통은 이 세 가지에 불과합니다.즉고통의 느낌,즐거움의느낌,고통도 즐거움도 아닌 느낌입니다.이 세가지 모두 고통입니다.모든 느낌은 전부 고통입니다.그것의 본질이 바로 고통입니다.

3)고통의 느낌과 연기

여러 감각은 다 고통이며 모든 느낌은 다 고통입니다.이것은 연기법과 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즉,우리의 어떤 행위의 조작이 모든 느낌은 전부 고통이라는 것을 야기하는 것일까요?우리의 어떤 행위의 조작,어떤 행위의 화합이 이런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에 이르게 하는 것일까요?이는 다른 것입니다.두 가지의 다른 인연이 생겨난 것입니다.즉 청정법의 연기법과 염오법(染汚法)의 연기법입니다.불법을 배우는 목적은 바로 염오법(染汚法)의 연기(緣起)을 청정법의 연기(緣起)으로 바꾸는 것입니다.염오법의 연기와 청정법의 연기를 구별하는 관건은 어디에 있을까요?사람의 마음상태에 있습니다.사람의 내면 속에서 불법을 대하는 성취에 있습니다.이런 측면으로 판단하고 대하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심리가 건강한 한 사람과 심리적으로 질병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이 둘은 다른 종류의 사람입니다.심리가 건강한 사람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낙관적이고,심리적으로 질병이 있는 사람은 사물을 대하는 관점이 비관적이며 소극적입니다.이는 두 가지의 다른 인식입니다.마음속에 결점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인지하는 결과도 부정적입니다.심리가 건강하면 외부의 사물에 대한 인식도 비교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것입니다.

4)수행만이 고통을 없앨 수 있다

불법의 관점으로 설명하자면 여러분이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든,질병이 있는 사람이든 이런 것은 모두 세간법(世間法),세간선법(世間善法)입니다.세간선법은 우리의 생사 윤회를 야기하여 해탈할 수 없게 합니다.오직 세간선법을 출세간선법(出世間法)과 무루선법(無漏善法)으로 변화시켜야만 희망이 있는 것이며,수승한 것이며,가장 좋은 것이고,비로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세간선법을 무루선법으로 바꾸려면 반드시 수행에 의지해야 하고,번뇌를 다스리고 조절하여야만 전환할 방법이 생길 것입니다.즉,만일 우리가 번뇌의 마음을 갖고 일을 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바로 세간선법인 것입니다.

6.귀인이 길을 인도하니 불법에 따라 실천하라

1)보리도를 기반으로 자량(資粮)을 모으다

여러분이 불교도라고 해서 여러분이 하는 일이 바로 불법인 것은 아닙니다.우리 자신이 하는 이런 선법들이 보리도상에서 성불하는 자량을 쌓고 모으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우리의 모든 행위가 비로소 가장 의미 있는 것입니다.즉,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자기 생명의 방향,생명의 귀속,생명의 목표,궁극적인 신앙과 함께 연계해야 합니다.만일 우리가 잊으면 자연히 우리의 이 동력은 힘이 떨어지고 우리의 방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우리가 오늘 기억하기 시작할 때 불법과 부합하고 이는 우리가 내일 불법과 부합하고 모레 불법과 부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오늘 우리가 기억하기 시작할 때 불법은 내면에서 나타날 수 있고,가장 좋고,가장 정확한 것입니다.하지만 우리가 법당을 나서고,절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고 직장으로 돌아가면 불법은 또 잊혀지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때,일을 할 때,원래부터 있던 세간의 이런 마음 상태가 또 다시 돌아오고,불법은 또 다시 절로 돌아가 버립니다.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 과정에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훈습(熏習:습관적 행동에 따른 잠재인상을 가리키는 말로서,어떤 것에 계속하여 자극을 줄 때,그것이 점차 그 영향을 받는 작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끊임없이 자기가 하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야 합니다.그래서 우리가 절에서 종종 일을 하기 전에 전행(前行:준비)이 필요한 것입니다.즉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절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두에게 일깨워 우리가 하는 일이 성불하기 위한 자량을 모으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시시각각 우리에게 일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2)생명의 방향과 귀착점을 찾으라

우리는 귀의를 해서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고,생명 가운데 가장 우리를 돕고 싶어하는 사람을 찾고 우리 생명의 방향과 귀속을 찾고 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귀의 법회,귀의의 의의 등을 일반적인 일과 같이 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이야기한 이런 내용들은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좀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이것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비로소 오늘의 도리를 더욱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한편으로는 여러분이 귀의를 한 이후에 오늘 이야기한 이런 불법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보아야 하고,또 한편으로는 앞에 했던 법문의 내용과 연계시켜 보아야 합니다.오늘 제가 이야기한 이 내용들은 앞에 했던 법문의 내용에 따라 전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한 회 한 회의 법문이 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만일 앞에 했던 법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늘의 법문도 깨우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배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들은 이후에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이며,받아들인 이후에는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입니다.여러분이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실천해야 만이 유용한 것입니다.그래서 여러분이 법문을 들은 후에 발심하여 열심히 불법을 실천해야 합니다.이렇게 하면 우리는 불법의 진실된 이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법문을 마치며,여러분을 축원합니다. 

편집:설원춘
태그:생명의 귀인 귀의처 보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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