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느끼고 깨닫다> 제8장 어떻게 자신의 먼지를 씻어낼 것인가

Author:쉬에청 큰스님     기사입력:2016-07-04 12:51:56
2006년 11월 25일, 북경에 올 겨울 둘어 첫 눈이 내렸습니다. 쉬에청(學誠) 큰스님께서 오후에 <어떻게 자신의 먼지를 씻어낼 것인가>라는 주제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우리가 털어내는 먼지와 제거하려는 쓰레기는 외재적인 것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의 탐, 진, 치,번뇌의 먼지를 씻어내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차례대로 수행하고 배우자

1)삼사도(三士道)

오늘 우리는 또 불법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여러분이 불법을 배운지도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특히 보리도에 이르는 차제(道次第)에 하사도(下士道),중사도(中士道),상사도(上士道)를 배우고 있습니다.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하사도(下士道)의 목적은 우리에게 번뇌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며,중사도(中士道)의 목적은 우리가 이치에 맞게 번뇌를 없애는 것이며,상사도(上士道)의 목적은 나쁜 습관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이는 우리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아주 명확히 알려주고 있습니다.첫째 번뇌를 일으키지 말 것,둘째 번뇌를 다스릴 것,셋째 나쁜 습관을 끊어버릴 것.우리가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든지 번뇌를 다스리고 나쁜 습관을 끊어버리는 것도 모두 불법에 의지해야만 합니다.불법이야말로 번뇌를 다스리는 좋은 약인 것입니다.

2)번뇌는 독약과 같다

번뇌가 많으면 번뇌의 기능이 커지고 번뇌의 폐해도 아주 심각합니다.우리는 많은 번뇌를 탐(貪),진(嗔),치(痴)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또한 탐진치를 세 가지 독으로 비유합니다.여기에서 독은 “독약”의 “독”입니다.사람이 독약을 많이 먹게 되면 목숨을 잃게 되고,조금이라도 먹게 되면 신체에 아주 큰 상해가 남습니다.이는 형상이 있는 것,눈으로 볼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물질적인 측면의 독약을 가리킵니다.우리 마음 속에도 독약이 있습니다.이 세 가지 독약은 우리의 생명에 아주 심각한 해를 끼칩니다.우리는 자신을 병든 사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불법에서 자기를 병자로 여기라 말하는 것이 우리 몸의 어떤 부분,어떤 기관에 문제가 있거나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병이 신체 기관의 결핍,신체가 건강하지 않은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즉,우리 생명의 깊은 층면에 이미 독이 중독되어 우리 내면에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일반적인 문제나 보통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기 내면에 그렇게도 많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의 번뇌를 일으키고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독약을 먹은 것처럼 자신에 대해,타인에 대해 큰 상해를 입힙니다.이런 상해는 그때 바로 서로간에 감정을 상하게 하고 화목하지 못하게 하며 사람을 난처하게 하고,마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사실상 이런 작용이 계속 지속될 수 있고 내일까지,미래까지 지속되고 심지어 당신의 내세,더 먼 미래까지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독약을 먹은 후에 중독이 된 것입니다.

3)불법은 좋은 약과 같다

이런 독은 그것을 뽑아 버리고,제거해 버리려면 또 다른 약이 있어야만이 우리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런 독,즉 탐(貪),진(嗔)치(痴)세 가지 독을 정화하려면 불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두 집에 불경이 많을 것입니다.여러분이 번뇌를 일으킬 때,이 불경은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왜 그럴까요?여러분이 번뇌를 일으킬 때 경전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역으로 말하면,당신이 이 번뇌의 마음으로 경계를 마주할 때,번뇌의 작용은 더 강렬해집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환경을 바꿔야 합니다.예를 들어 절에서 여러분이 수도(修道)하고 노력하면 우리의 내면이 비교적 쉽게 평온해지고 번뇌가 쉽게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동시에 우리는 절에서 또 불법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불법을 들을 때,그 자체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다스리고,번뇌의 드러남을 다스립니다.스스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그 자체가 바로 공하사도(共下士道)의 기초이자 특징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경전을 보고 테이프를 들을 때,번뇌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듣는 소리,우리가 보는 글자도 모두 번뇌로 바뀝니다.절에 있을 때는 수행 도반이 있고,법사님이 우리에게 불법을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는 희구심,신심이 있어 외부의 이런 경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불법이 함유하는 뜻을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받아들일 때 불법이 작용을 합니다.만일 이렇지 않다면 우리의 번뇌의 마음이 무거워지고 더욱이 자주 번뇌가 일어나고 나쁜 습관도 아주 심각해지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또한 다스릴 능력도 없습니다.이렇다면 비록 우리가 불법을 배운 시간이 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자기의 번뇌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번뇌가 자기 생명에 끼치는 독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진정으로 의식하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2.어떻게 해탈을 이룰 수 있는가

1)먼지와 때를 씻어내자

어떻게 자기의 번뇌를 정확히 다스릴 수 있을까요?이치에 맞게 불법을 수행하고 불법을 지켜야 합니다.이치에 맞춰 불법을 수행하고 지니면 우리는 자주 육가행(六加行)을 듣게 됩니다.육가행의 첫 번째 가행은 거처를 청소하여 신(身),어(語),의(意)가 의지하는 곳을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거처 청소”란 바로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작업장 청결,청소,장소 배치 등 입니다.“신(身),어(語),의(意)가 의지하는 곳을 장엄하게 하다”에서 몸이 의지하는 것은 불상이고,말이 의지하는 것은 불경이며,뜻이 의지하는 것은 불탑입니다.인도나 태국,스리랑카,라오스 등의 남전불교(南傳佛敎)국가의 절에는 탑,보리수,불상이 있습니다.중국에도 많은 절 안에 탑이 있습니다.불상,불경,탑,이것은 몸,말,뜻이 의지하는 곳을 대표합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청소의 다섯 가지 공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첫 번째 공덕은 자신의 마음이 청정해 지는 것,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청정해 지는 것,세 번째는 여러 천신(天神)이 기뻐하는 것,네 번째는 세찬 업(猛業)을 만들어 내는 것,다섯 번째는 죽은 후에 천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천계에 태어나는 것”이 바로 정토에 태어나는 것이며,“세찬 업(猛業)을 만들어 내는 것”은 청정한 계율이고,천신(天神)이 기뻐하고 자신의 마음,타인의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거처를 청소하고 청결히 할 때 자기의 마음도 청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이것이 다섯 가지 공덕의 첫 번째입니다.우리는 어떻게 주변을 청소하는 일과 번뇌를 다스리고 이치에 맞게 불법을 수행하고 지키(修持)는 것과 결합할 수 있을까요?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수행이나 번뇌를 다스린다는 것을 청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연상해본 적이 없습니다.우리는 늘 청소,정리정돈은 다 배우지 못하거나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여겨왔습니다.사실 불법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장 단순한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막 출가했을 무렵,절에 계신 노스님께서 마당 쓸기는 3년을 배워야 하고 차를 끓이는 것도 3년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 당시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마당 쓸기를 3년 배우라 하시는데 이는 너무 쉽게 배울 수 있어서 한두 시간 안에 배웠습니다.게다가 먼지가 있든 없든,쓰레기가 있든 없는 매일 쓸어야 했습니다.사실 이는 수행의 하나로 우리가 길고 멀게 보는 마음을 기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지를 깨끗이 하고 쓰레기를 청소할 때 이 먼지와 쓰레기는 외재적인 것입니다.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내면의 탐진치 번뇌의 먼지를 깨끗이 제거하는 것입니다.외재적인 먼지라는 비유,상징을 통해 우리 내적인 번뇌의 쓰레기를 확실히 인식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주리반타카(周利槃陀伽)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그가 출가한 후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에게 “먼지를 청소하고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다(掃塵除垢)”라는 네 글자를 알려주셨으나 3개월을 배워도 그는 기억하지 못했습니다.하지만 마지막에 갑자기 완전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부처님께서 그에게 예언을 해 주셨으며(授記)주리반타카는 부처님의 모든 성문승(聲聞乘)제자 가운에 마음의 전환이 가장 수승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는 매일 마당을 쓸고 마지막까지 그 일을 하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그를 위해 예언을 해 주셨습니다.

그는 마당을 쓸면서 어떻게 이런 성취를 이뤘을까요?그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실천했습니다.부처님은 그를 위해 “ 이 먼지는 탐이오 먼지가 아니다.먼지는 탐과 명예이지 먼지가 아니다.모든 지자들은 먼지를 다 제거하고 여래의 가르침 속에 방일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우리가 청소를 하는 것은 내면에 있는 탐욕의 먼지,진노의 먼지,어리석음의 먼지 등을 없애려 하는 것입니다.이는 삼독의 쓰레기입니다.

2)번뇌를 다스리면 청정해진다

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수행해도 자기 내면의 쓰레기,자기 마음속에 있는 문제를 인식할 수 없으면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우리는 또 어떻게 청소해야 할까요?이는 아주 중요한 점입니다.우리가 하는 수행은 경전을 읽고,기도를 하고,절을 하는 것입니다.이것이 수행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청소를 하는 것이 법을 수행하는 것이라 말하기 어려워합니다.사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만일 우리가 내면의 번뇌라는 먼지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일 이곳에 앉아 글자만 읽고 있을 뿐 실제로는 읽는 것과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입으로는 불경을 읽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번뇌가 일어나고 심지어 갈수록 번뇌로 둘러싸여 다스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갈수록 심각해 질 것입니다.

우리 내면은 어떻게 해야 청정한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우리가 번뇌를 다스려야만 내면은 청정해지고 밝아지며 편안하고 즐거워질 수 있습니다.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면이 청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면 기쁜 마음이 들고 그의 내면도 청정해집니다.다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들어도 즐거워지고 그의 내면도 청정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하늘의 신이 우리의 계율에 모자람이 없고,내면이 청정한 것을 보시면 또한 기뻐하실 것입니다.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치에 맞게 불법을 수행하고 지키는 것인지를 진정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3)번뇌를 벗어나려면 수행을 해야 된다

만일 우리가 기본적인 노력과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수행을 할 수 있을까요?만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열 수 없고,정화할 수 없다면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여전히 많은 장애가 남아 있고 이는 조건이 아직 부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그래서 육가행(六加行)의 첫 번째 가행이 바로 자신과 타인의 장애,자신과 타인의 어긋난 인연,수행도반 사이의 어긋난 인연,선지식과의 어긋난 인연을 제거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자신의 번뇌를 명확히 인식하고,자기의 내면 상태를 명확히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의 내면을 높게 향상시키면 우리가 처한 이런 현황,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조건이 반드시 자기의 생각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틀림없이 바로 우리가 이 길을 둘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길을 둘러 간다”라는 말은 당신이 일직선으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곡선으로 된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한 바퀴 둘러 가서 마지막에 원래의 이 자리에 돌아온다면 길을 잘못 간 것입니다.그래서 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보리도에 이르는 차제>를 배운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하나 하나에 따라 진정으로 실천해야 하고 만일 이런 정법(正法)을 따라 실천하지 않는다면 모두 헛되이 바쁘게 움직인 것으로,근본적으로 내재한 번뇌는 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앞 시간에 말씀 드렸던 <번뇌를 인식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다>의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번뇌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각종 고통은 갈수록 많아져서 제거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자주팔고(八苦:여덟 가지 고통)을 이야기 합니다.지금 갖고 있는 이러한 고통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현세에 사람의 몸을 갖고 태어난 것은 물론 과거에 우리가 사람이 될 수 있는 업의 인을 만들었기 때문이지만 우리가 지금 사람의 몸을 가졌다는 것이 꼭 과거에 수행을 했다거나 어느 정도까지 수행을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물론 과거에 수행을 했던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모든 사람들이 수행을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간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당신이 그들을 절에 오라고 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경전을 들으라 하면 그 사람들은 아마 오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면 그 사람은 선근이 부족한 것입니다.하지만 그들도 사람입니다.심지어 신분이 높고 지위가 높으며 학문이 높은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여러분이 사람의 몸을 가졌다는 것이 꼭 전생에 수행을 잘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우리가 수행하지 않는 다면 이런 고통,이런 문제는 아마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고 줄곧 쌓여가서 부단히 지속될 것입니다.

불법은 팔고(八苦:중생이 겪는 여덟 가지 고통)를 최후에는 오온성고(五蘊熾盛苦)로 귀결시키셨습니다.이 고통은 물질적인 측면에 편중하지 않고 또한 정신적인 측면으로 편중되지도 않으며 오온이 합쳐진 것입니다.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고통인 애별리고(愛別離苦),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살아야 하는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인 구부득고(求不得苦).이 세 가지는 우리 내면의 고통입니다.생로병사는 우리 신체상의 고통입니다.몸과 마음이 합쳐진 고통이 바로 마지막으로 오온(五蘊),즉 나를 구성하고 있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너무 강렬한 고통인 오온성고(五蘊熾盛苦)입니다.신체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을 막론하고 심신이 합쳐진 고통도 모두 없애야 합니다.어떻게 해야 비로소 이런 측면의 고통을 없앨 수 있을까요?오직 불법만이 없앨 수 있고 해탈할 수 있습니다.무엇을 해탈합니까?고통을 해탈합니다.고통을 어떻게 해탈할까요?업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고통을 불러 모으는 업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우리는 어떻게 악업을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번뇌를 끊어내야 합니다.번뇌는 어떻게 끊어내나요?불법에 의지해서 다스려야 합니다.우리가 불법으로 번뇌를 다스리면 악업을 짓지 않게 됩니다.이런 업이 없으면 팔고(八苦)도 끌어 오지 않을 것입니다.팔고(八苦)이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해탈입니다.바로 이렇게 연관 되어 있는 것입니다.

3.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

1)무한한 생명을 인식하자

절에 오면 “무한생명”이라는 명제를 자주 듣게 됩니다.우리는 어떻게 무한생명의 관점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펴보아야 할까요?어떻게 무한생명이라는 기본적인 프레임으로 자기의 일생을 보아야 할까요?어떻게 무한생명이라는 관점으로 자기 자신의 완전한 존재를 인식해야 할까요?즉,우리가 자기 존재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생명에 대해 정확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무한생명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는 것은 과거에 어떻게 존재했고,현재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어떻게 존재할 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과거의 존재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미래의 존재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현재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습니까?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만일 인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시각장애자와 같이 길고 짧은 것,네모나고 둥근 것,푸른색,노란색,빨간색,하얀색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자기가 진정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우리 생명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어떻게 자기 생명이 내포하는 것을 풍부하게 할 수 있을까요?어떻게 스스로 불도를 성취하는 자량을 길러낼 수 있을까요?어떻게 업과를 믿을까요?어떻게 귀의하는 마음을 낼 수 있을까요?시각 장애인은 외재적인 경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이렇다면 길을 걸을 때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우리가 만일 이런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바로 맹목적으로 수련하는 것과 같습니다.“맹목적인 수련”이란,단지 법당 안에서 하는 종교의식입니다.모두가 경전을 읽을 때 따라서 읽고,절을 할 때 따라서 절을 하고,합장할 때 따라 하고 올 때 따라 오고 갈 때 따라서 가는 것으로 그냥 단지 형식적인 순서일 뿐으로 진정으로 자신의 번뇌를 다스리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생명존재에 대한 명제는 단지 공간상에서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측면으로도 보아야 합니다.우리의 생명 경험,생명 체득,생명 과정 모두 이 점을 증명할 수 있으며,또한 이 방면의 진입점,시작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비록 우리가 어떤 한 각도로 말하지만 자기 생명의 모든 순간,매 일분,매 일초는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또한 일각 전,한 생각 전의 자기의 몸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우리의 지식,우리의 정신,우리의 경험,우리의 능력도 죽고 있다,지나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이런 것들은 꼭 지속되어 나갈 것이고 연속되어질 것입니다.과거의,단지 과거의 시간 속에 있던 우리의 이런 신체는 이미 현재로 옮겨져 왔습니다.“앞의 한 생각,앞의 일초,앞의 일각에 형상이 있던 피와 살이 있는 몸”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어제의 나,과거의 나는 이미 현재로 왔기 때문입니다.이미 오늘로 왔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볼 수 있고,만질 수 있는 나의 피와 살이 있는 몸,오온과 합쳐진 몸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하지만 우리 정신영역에 내포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우리의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다,우리의 업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불법으로 인생을 선택하자

한 어린 아이가 어떤 작은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아 슬픔을 느꼈다면 그 아이는 단지 그 점에만 국한하여 연연해 할 것입니다.그 아이는 더 멀고 길게 보는 안목이 없으며,더 넓은 마음으로 발생한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들,성인들은 비교적 성숙하여 더 멀고 길게 보는 안목이 있습니다.그래서 아이였을 때 어떤 일을 하고 싶어했는지 청년일 때 어떤 일을 하고 싶어했는지,중년일 때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했는지,어떤 일을 해야만 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 경험이 쌓인 것입니다.이런 경험에는 좋은 경험도 있고,나쁜 경험도 있습니다.정확한 경험도 있고 잘못된 경험도 있습니다.나쁜 경험이 쌓이고,좋은 경험도 쌓입니다.선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악업도 지속적으로 늘어납니다.우리가 과거에 발생한 일과 연계해서 바라보고 연계해서 분석하고 연계해서 결정하기 때문에 이 일은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이는 모두 과거의 경험에 기초하여 우리가 현재 어디로 가야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판단 하는 것입니다.즉 우리가 현재 어떻게 해야 할 지의 목적은 미래에 있으며 미래의 성취,내일의 성취,내년의 성취,더 먼 미래의 성취에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집안의 가장은 아이에게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를 보내어 공부를 시킵니다.만일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장래성이 없고,학력도,졸업장도 교양도 없을 테니 이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음을 가장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더 늘려 부모님뿐 아니라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조부모,증조부모의 경험까지 더 하면 이러한 경험은 몇 십 년,백 년이 됩니다.부처님의 경험은 아주 길고도 멉니다.부처님은 다생다세,세세생생,무량겁의 시간이 흘러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 몇 십 년 동안에 하는 일의 의미를 보십니다.물론 이런 경험은 같지 않습니다.자연히 부처님의 판단기준도 다르고 선택도 다릅니다.즉,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부처님의 경험에 근거하여,불법의 기준에 근거하여 자신의 인생을 마주하고 살펴보는 것이며,자기의 인생을 위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는 이 몇 년,몇 십 년의 의의,심지어 눈 앞에 있는 조금의 의의,눈 앞의 조금의 성취에 불과합니다.이렇다면 이는 가치가 없고 진정으로 불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눈 앞의 일만 잘 해낸다면 이는 한참 부족한 것입니다.눈 앞의 일을 잘 하는 목적은 미래의 성취,내세의 성취를 위해서 입니다.즉,우리가 현재 주목하는 것은 “인(因)”을 심는 것이지 성취나 성공에 주목하는 것이 아닙니다.만일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심는 인(因)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그래서 이는 다른 것입니다.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사회에서 일을 한다면 하루에 얼마를 받길 원하는지는 먼저 명확히 이야기해야 합니다.이렇게 해야 이 일을 공연히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만일 당신이 그에게 거저 해달라면 그 사람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왜 그럴까요?그의 성취는 바로 지금,현재에 착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고,자량을 모으면 달라집니다.완전히 달라집니다.이 뜻은 무엇일까요?즉,우리가 절에서 일 하는 것으로 어떻게 자기의 성취를 판단하고,어떻게 자기의 성공을 판단하며,어떻게 자기가 한 일이 맞는지 잘못됐는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까?그것은 눈 앞의 것만 볼 수는 없습니다 .눈 앞의 것을 보면 명확하게 볼 수 없으며 봐도 잘 알 수가 없으며 쉽게 잘못을 저지릅니다.눈 앞의 것을 보는 것은 세간 사람의 기준이며 보통사람의 기준입니다.멀고 길게 보고,세세생생으로 보아야만이 불법의 기준입니다.이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3)시간을 잘 활용하자

과거는 계속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찰나 찰나마다 나고 멸합니다.하지만 지나갔다고 해서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단지 현재의 존재하는 형식이 또 다른 하나의 존재 상태로 전환된 것입니다.이런 존재는 불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불법을 충분히 배우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현재의 이런 생명 상태와 과거세와의 밀접한 관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며,이런 신심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물론 우리도 가끔 자기가 몇 년 전,몇 십 년 전에 노력하지 않고 일을 잘못했을 때를 의식할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그것뿐 입니다.우리는 몇 년 전,몇 십 년 전에 자기가 마땅히 어떻게 배워야 했으며,자기가 어떻게 수행했었어야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를 연상하거나 검토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또한 어쩌다가 자신이 과거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의식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기의 시간을 잘 활용하여 헛되이 보내지 않을지,어떻게 시간을 잘 사용할지를 반성하기는 어렵습니다.우리는 과거의 많은 시간을 낭비해 버렸지만 반성하지 않고 이런 손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물론 자기생명의 이런 경험은 또한 흘러 갈 것이고 지속될 것이며 현재의 시간에 대해서도 귀한 줄 모르겠지요.

불교를 믿는 사람들,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시시각각,일분 일초의 시간을 움켜 쥐어야 합니다.만일 시간을 잡지 못하면 시간은 아주 빨리 지나가고 계속 지나가버릴 것입니다.시간은 계속 지나가는데 우리가 수행도 하지 않고 자량을 모으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기 생명에 손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손실이 난다는 것은 선업이 쌓이지 않는 다는 것으로,계속해서 손실이 나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생명은 끝이 나고 죽음을 맞게 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 가지 못하고 오직 업만을 갖고 가게 될 것입니다.그때가 오면 이미 늦어버린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법에 따라 불법을 수행할 때 시시각각 자기 생명의 깊은 곳의 원인,즉 번뇌를 찾아야 합니다.

4.공업으로 성불의 경지에 오르자(共業增上)

1)공업(共業)과 별업(別業)

“땔감의 불은 서로 전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불은 땔감이 있어야만 타오를 수 있습니다.이 땔감이 다 타고 난 후에 불은 다른 땔감으로 옮겨 계속 타오를 수 있습니다.사람의 생명도 마찬가지 입니다.한 생애,또 한 생애 계속 이어집니다.이 땔감의 불이 다하면 다음 땔감으로 옮겨 타오릅니다.다음 땔감이 다 타고 나면 또 다른 땔감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이것이 무슨 뜻일까요?바로 사람의 생명은 과거와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연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동시에 사람의 생명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자기의 행동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우리가 나무 한 토막,두 토막,세 토막,열 토막,백 토막을 같이 버리면 동시에 타오를 수 있습니다.즉,우리 모두가 절에서 법당에 앉아 우리 자신의 내면과 다른 사람의 마음,우리 자신의 업과 다른 사람의 업을 하나로 모으면 이를 각각의 업 즉,별업(別業),공동의 업 즉,공업(共業)이라고 부릅니다.우리 각자는 하나의 나무 토막입니다. 1백 명은 1백 개의 나무 토막입니다. 1백 개의 나무토막이 함께 있을 때 1백 개의 나무토막은 함께 타오르며 한결같이 서로 어울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서로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이런 업의 힘은 불가사의합니다.

절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삼보와 서로 어울리는 업이며,부처님과 서로 어울리는 업으로 모두 청정하고 새지 않는 것입니다.물론 우리 마음속의 지혜의 불꽃도 쉽게 증가할 수 있고 쉽게 타오를 수 있습니다.역으로 말하면,우리가 만일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심지어 세간에 단정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물론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우리가 좋을 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좋지 않을 때 우리도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상호영향으로 어떤 쪽의 힘이 비교적 강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우리가 만일 조심하지 못하고 부주의하면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이는 명확한 것입니다.만일 우리가 시시각각 불법의 정념(正念)을 하여 자기의 내면을 방어하는 것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좋지 않은 업의 영향을 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만일 이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원래의 그 번뇌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당연히 번뇌와 번뇌는 서로 어울리게 되는 것입니다.번뇌는 번뇌와 서로 어울립니다.번뇌는 지혜와 어울리지 않고 지혜는 번뇌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2)역경 속에서 자량을 모으자

번뇌를 다스리는 과정은 우리가 수행을 하는 전체 중 하나의 과정입니다.즉 우리가 절에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때 그때가 바로 하사도(下士道)에 이른 것입니다.여러분이 다스리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중사도(中士道)에 이른 것이며,당신의 습관이 없어지면 그때가 바로 상사도(上士道)에 이른 것으로 이는 다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물론 여러분은 잠깐 동안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예를 들어 한 두 시간,하루 이틀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하기는 어렵습니다.만일 영원히 번뇌가 일어나기 않는 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번뇌를 이미 다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래서 여러분이 절에서 일을 하든,공부를 하든,자기가 번뇌가 있다거나 자기가 말을 잘못했다거나,일을 잘못했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이런 것은 모두 정상적인 것입니다.우리가 일을 잘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어떻게 이것을 거울로 삼고 이런 경계 속에서 자기의 마음 경계를 향상시킬 수 있을까요?우리는 절에서 스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경계가 향상되고 자량이 쌓이는 것은 종종 이러한 역경 속에서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자주 듣습니다.하지만 우리의 통상적인 사유습관으로 볼 때 꼭 부처님께 절을 하고 경전을 읽을 때 비로소 자량이 쌓인다고 여기며,이런 좌절과 역경을 만났을 때에는 아니라고 여깁니다.심지어 차를 따르고 마당을 쓸고,의자를 옮기고 장소를 정리할 때에도 자량은 쌓입니다.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이야기 해주는 것도 자량을 쌓는 것이며 우리도 즉각 그를 따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마음속으로 진정 동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이 점으로 우리 마음속과 불법이 서로 어우러지는가 아닌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도차제(道次第)에서는 역경 속에서 번뇌를 다스리는 것 자체가 바로 자량을 쌓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아마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들어보았을 것 입니다.우리가 알고 있고 들어보았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어떤 상태라야 동의하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이런 도리 하나에 동의하는 것입니까?아니면 이 도리가 자기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동의하는 것입니까?우리가 불법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자기와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만일 자기와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닙니다.불법 자체가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모든 중생에는 당연히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역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불법을 논할 때 만일 자기도 자기와 불법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불법과 다른 유정물이 관련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불법 자체가 바로 모든 유정물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만일 우리 자신이 불법이 필요하지 않고 불법이 자기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의식하지 못하면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한 불법이 진정한 불법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 당신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했음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즉 우리 자신이 불법을 어느 정도 잘 배웠을 때 최소한 우리 자신이 번뇌가 일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을 도와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3)번뇌를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수행

번뇌가 일지 않게 하려면 수행을 해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번뇌가 일었을 때 자기가 번뇌가 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우리가 병이 걸렸는데 자신은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의사가 알려줬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의사가 우리에게 알려줄 때 우리는 여전히 믿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하지만 의사는 지표를 늘어놓고 당신의 신체 어떤 부분이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지를 알려줍니다.심전도가 어떻고,혈압은 어떻고,콜레스테롤은 어떻고 이런 지표를 늘어놓습니다.기구로 한 번 검사해 보면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부분이 초과하는지 나와서 당신이 믿지 않는 것도 소용없어 집니다.중의사도 어떤 병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불법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에게 탐욕은 어떻게 표현되고 진노는 어떻게 나타나며,어리석음은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알려줍니다.여러분이 이런 특징을 갖고 있고,이런 문제가 있다면 바로 여러분이 이런 측면에 번뇌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번뇌가 있으면 곧 위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한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그래서 오늘 우리도 비교적 실재적인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만일 우리가 실재적이지 않은 것을 이야기 한다면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일 것입니다.우리가 이론만 가득 이야기 한다면 여러분은 불법이라는 것이 자기와는 먼 이야기라고 느낄 것입니다.만일 불법이 자기와 아주 가까운 것을 말하거나 자신을 이야기 할 때 때로 우리도 마음속이 편지 않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느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이때가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우리가 자기 내면에 문제가 있고 내면에 번뇌,고통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내버려 두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바르게 다스리고 하나 하나 다스려 나가고,천천히 다스리는 것이 바로 다스리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우리가 다스릴 때 그때가 바로 진정으로 공부를 하는 때이며 진정으로 법에 따라 불법을 수행하는 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4)자아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배우자

우리가 삼보의 곳인 절에 와서 모두들 법에 따라 불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절대로 안하무인의 마음,거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보아서는 안됩니다.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오직 공정한 마음,겸허한 마음,진지한 마음,성실한 마음으로 불법에 따라 실천하여 한 걸음 걸음 마다 실현해야만이 불법이 비로소 자기의 생명과 진정으로 서로 결합할 수 있습니다.자신을 보십시오.번뇌가 일어나고 있는지,일어나고 있지 않은지.번뇌를 다스리고 있는지 아닌지,어떤 습관이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비록 번뇌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번뇌의 습관이 있습니다.성불할 때 이런 습관이 비로소 완전히 없어집니다.성불하기 이전에는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상사도(上士道)에서는 습관을 다스려야 한다고 방금 말했습니다.첫 번째 우리는 먼저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두 번째는 우리가 조금씩 번뇌를 다스려야 합니다.절에서는 모두 이런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모든 사람이 발심하여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그래서 모든 사람의 발심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어떤 사람들은 수행을 비교적 잘 하고 수행 시간도 비교적 길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수행을 비교적 오래한 사람들,공부한지 비교적 오래된 사람들도 처음 발심한 사람을 경시할 수 없습니다.반대로,처음 발심한 사람,처음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공부한지 오래된 수행 도반들을 열심히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우리에게 공부의 모범,본보기가 있어 공부를 따라 하면 틀리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자기가 가장 잘나서 배울만한 사람이 없고 배울 대상이나 본보기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보살도 오명을 배우고 보살도 모든 중생에게서 불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불법은 모든 유정물의 몸과 마음에 체현되고 실현되는 것입니다.우리는 앞으로 불법이 이끄는 과정 속에서 한 발 한 발 더욱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한 걸음 한걸음 더욱더 구체적이고 더욱 직접적이게 될 것이라고 여러분께 약속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발심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편집:설원춘
태그:마음의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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