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느끼고 깨닫다> 제6장 도반의 공덕과 경험을 나누는 방법

기사입력:2016-07-04 12:50:42
2006년 10월 27일 저녁,쉬에청(學誠)큰스님께서 일본에서 북경으로 돌아오신 후 28일 오전 9시, 제자들에게 <수행 도반의 공덕과 경험을 나누는 범>에 관해 범문을 헤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법은 법사, 도반에 의지하여 전달되고 구현되어야 하며, 선지식, 법사, 도반의 모든 행동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 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5장서 우리는 궁극신앙을 세우는 의의에 대해 이기했습니다.이 주제 잘 이해해만이 무한 생명 대해 큰 움을   있습니다. 다른 각도로 보자면 무한 생명에 대한 개념을 으로 세우기 어려우면 자연히 궁극신앙에 대해서도 같기도 하고 없는것 같기도 하여 그리 명확하지 않을 니다.


1.생명,심오한 명제

1)흐르는 물의 계시

일반인들에게 무한생명이란 그리 깊은 지혜로 인식하거나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생명 자체가 바로 심오한 문제인 것입니다.

중국 고대 성인인 공자는 일찍이 강가에 서서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와 같으리!밤낮으로 끊임 없이 흘러가는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공자가 강가에서 물이 계속해서 흐르는 것을 보고 무상(無常)과 무한(無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강물이 계속하여 흐르니 이것은 무상을 설명하는 것이오 “밤낮으로 끊임 없이 흘러가는 도다”는 밤낮으로 멈추지 않으니 무한함을 말하는 것입니다.우리는 강가에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도 이렇게 깊은 뜻은 좀체 알기 힘듭니다.우리는 아마도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물의 흐름이 변하는 것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실제로 우리가 눈 앞에서 보는 흐르는 물은 한 시간 전,두 시간 전,하루 전,이틀,삼일 전,한달 전,두 달,세달 전, 1년 전, 2년, 3년 전, 모두 각각 달랐습니다.우리가 오늘 남경(南京)에서 본 물은 어제,그저께에는 어쩌면 무한(武漢)에 있었을 것이고 그 보다 전에는 아마도 중경(重慶)에 있었을 것이며,그 보다 오래 전에는 신강(新疆)에 있었을 것이며 그 이전에는 어쩌면 하늘 위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즉,우리가 흐르는 물을 보았을 때,우리는 이 물이 수 없이 많은 산과 내를 거쳤고,수많은 집을 거쳤고,이 물이 변화무쌍한 경지를 겪어왔다는 것을 알아보고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다시 말해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이 물은 여기에서 한 두 시간 후,하루,이틀,삼일이 지난 후에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그 물은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갈 수도 있고 다른 지류로 흘러갈 수도 있으며 농가에 관개수로 들어갈지도 모르며,어쩌면 사람과 동물들이 마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요?우리가 같은 물건을 보고,한 사물을 보아도 과거,미래와 연결하기 쉽지 않습니다.하물며 물의 용도가 얼마나 다양한지,인간의 생명에 대한 물의 도움이 얼마나 큰 지와 관련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우리는 이렇게 보기 참으로 어렵습니다.더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단지 물을 마시고 싶을 때,옷을 빨 때,목욕을 하려 할 때가 되어서야 물이 있는지 없는지,이 물이 깨끗한지 아닌지,위생적인지 아닌지를 생각합니다.우리의 외재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은 많은 상황에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 좋은 점이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하고 정확하고,전면적으로 한 사건의 본래 뜻과 기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물보다 더 복잡하고 심오합니다.그렇게 간단한 것도 명확히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무한생명이라는 이렇게 심오한 명제는 어떻겠습니까?우리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원인과 답은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무한 생명존재에 대한 우리 내면의 상태는 시시각각으로 부지불식간에 관통할 수 없는 자아에 의해 가려지고 있습니다.이것이 아집(我執),법집(法執)입니다.아집과 법집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바깥에 존재하는 오색찬란하고,거짓되고,눈 부신 현상 및 생명의 현상에 미혹되기 쉽습니다.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시간과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어떻게 현세의 이익과 눈앞의 득실을 가질 것인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자기의 생명을 눈 앞의 이익,득과 실에만 놓고 생각하니,자연히 우리 내면의 번뇌의 잔재가 넘쳐나기 시작합니다.번뇌의 잔재가 넘칠 때,무한생명(無限生命)의 상태,무한생명이라는 깊고 심오한 명제는 가려지고 사라지며힘을 잃습니다.

2)부처님의 선택

석가모니 부처님이 최초에 출가를 하실 때,알라라 칼라마(阿羅邏迦蘭)라 불리는 외도(外道)에게서 배움을 시작하셨습니다.부처님이 이 외도와 수행할 때 이 외도는 무상정(無想定)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세간 사람들이 색성향미촉,즉 오욕의 경계에 쉽게 빠지니 해탈하기 쉽지 않고 특히 청소년기에는 더 그러한데 당신은 왜 오욕의 경계를 이처럼 싫어하는가?혈육과 이별하는 것은 일반 세상 사람들은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왜 당신은 능히 이 것을 해내었는가?당신은 혈육과 이별했을 뿐만 아니라 오욕을 멀리 할 수 있었으니 이는 일반인이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다.일반인은 오욕의 경계가 필요하고 부모와 가족의 정을 필요로 한다.”라고 물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답하시기를,일반인은 오욕을 추구합니다.오욕의 경계가 즐겁다고 느끼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추구합니다.그런 후에 자기 내면의 욕락을 만족시킵니다.내가 출가를 한 것은 해탈하기 위함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입니다.부처의 내재적 욕망,바람은 오욕의 획득이 주가 아니고 온 세상의 생명을 구하고,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오욕의 경계는 꿈과도 같아 무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일시적인 것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며 무상한 것이며 그 자체에는 싫어하고 싫어하지 않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사고(思考)입니다.부처님은 오욕의 경계에 대한 혐오로 출가하신 것이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출가하셨습니다.이러한 경계 자체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으며,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부처님이 원하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고 오욕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일반인이 원하는 것은 이러한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라는 이러한 경계에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혈육과의 이별입니다.혈육을 멀리 떠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하지만 이러한 정은 꿈과도 같습니다.백 년 정도의 인생에 한번은 이별이 있습니다.영원히 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단지 그 시기가 좀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의 문제이지 마지막에는 결국 이별을 하게 됩니다.그래서 차라리 일찍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그것이 실질적으로 부모님,중생에 큰 이익을 주고 공헌할 수 있습니다.석가모니 부처님은 “오욕과 혈육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알라라 칼라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부처님은 당시에 이미 이런 인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2.지혜로 번뇌를 다스리다

1)내면을 다스리다

알라라 칼라마의 선정(禪定)의 경지는 부처님은 쉽게 이루셨습니다.즉 “무소유정(無所有定)”의 경지입니다.하지만 이 경지는 사람의 번뇌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고 단지 자신의 번뇌만 억제하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돌을 옮겨 풀을 누르는 것처럼 비록 이 풀이 오랫동안 돌에 눌려 있더라도 풀의 생명은 여전히 존재합니다.설령 그것이 아주 미약한 존재일지라도 존재합니다.이는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외도(外道)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으셔서 떠났습니다.“무소유정”또한 이미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왜 이렇게 말할까요?우리는 자기 내면의 번뇌를 극복할 수 있지만 번뇌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렵습니다.설령 우리가 불교도라고 하더라도,우리가 불법을 오랫동안 배웠을지라도 이 것을 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불법에서는 마음을 움직임에 힘을 쓰고,방법을 써서 번뇌를 다스리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이는 외도에서 말하는 “무상정”과는 다릅니다.“무상정”은 내면의 아주 미세한 번뇌 및 자기 색신(色身)의 장애,속박을 아직은 진정으로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비록 바깥의 경계,즉 오욕의 경계에 대해 싫어하고 혐오하는 마음이 강하다 하더라도 내면에 존재하는 그런 힘,그런 청정한 힘은 아직 진정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같은 범부들은 어떻게 내면의 마음을 다 잡아야 할까요?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억압의 방법을 써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우리 내면은 바깥의 경계를 포함한 여러 가지 경계에 대해 욕심부리고 집착합니다.탐심이 있어 집착이 생기는 것입니다.만일 우리가 외부의 경계를 탐하면 내면에는 계속해서 그것을 얻고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이 듭니다.불법을 배우는 우리는 바깥의 경계,특히 오욕의 경계에 대해 정확한 관념,정확한 태도를 갖고 그것을 대해야 합니다.지혜로써 그것을 골라내야 하며,“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실제로 이런 생각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극복하는 법을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우리의 마음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뇌,심장,신체 세포에 영향을 주고 심지어 우리의 혈액순환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본래 바다와 같고 우리의 모든 생각,모든염원(念頭)은 파도와 같습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훈련하는가를 배우는 것이지 마음이 일지 않게 하고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만일 염원이 생기지 않으면 우리는 고인 물이 되어 마음도 쓸모 없어질 것입니다.옛말에 “절망보다 더한 슬픔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마음이 한번 죽으면 구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를 마주할 때,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경계와 맞닿고,내면의 생각도 세차게 출렁여 솟구칩니다.또한 이 힘이 아주 강해집니다.오직 천천히 심신을 가다듬어 제어하는 것을 통해 조금씩 제어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2)반연(攀緣)의 마음

우리 내면의 생각은 바다 속의 파도와 같아 힘은 아주 강력하고 세차게 출렁입니다.당신이 큰 파도에 부딪치면 사람의 생명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는 집,농작물,선박도 모두 바다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우리 내면의 파도도 마찬가지이어서 그것의 작용도 아주 큽니다.예를 들어 우리의 눈은 물건을 볼 수 있고 외재적인 색상,형태를 볼 수 있어 생각이 생겨납니다.좋은 방면으로 말하면,우리가 불상을 보았을 때 우리는 마치 부처님을 본 것처럼 청정하고,장엄하며,지혜롭고,자비로운 이러한 경계가 자기자신,중생에게 어떻게 좋은지 어떤 이익이 있는지 등등을 알 수 있습니다.또한 우리의 눈이 불상을 볼 때 우리의 생각이 처음으로 아는 것은 불상이고,두 번째는 부처님이고,세 번째는 부처님의 신통한 작용이며 네 번째로 부처님이 자기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도움을 줄 지를 생각합니다.많은 생각이 연상되어 계속 이어지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고 추리해 나갑니다.

다르게 말하면,우리가 안 좋은 일을 보아도 이렇게 연상될 것입니다.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싫은 얼굴을 하거나 상대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좋지 않은 연상의 흐름이 생겨 “내가 어제 그 사람한테 뭘 잘못했나?” “예전에 내가 그 사람한테 미안한 일을 했나?”라는 생각을 하여 좋지 않은 연상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이는 아주 정상적인 것이며 자주 일어나고 모든 이들에게 있는 일입니다.이것이 우리의 마음은 줄곧 반연(攀緣:대상에 의해 마음이 움직임)하고 있습니다.

반연(攀緣)은 우리 내면이 스스로에게 따르는 경계로 물처럼 평정할 수 없고 계속해서 동요하고 있습니다.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의 마음은 줄곧 외부의 경계에 의해 동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우리의 첫 번째 생각이 이 경계를 보고,듣게 되고,그 후에 두 번째 생각,세 번째 생각,네 번째 생각이 일어나며 심지어 30분,한 시간 내지 며칠,몇 달,몇 년 동안 아마도 어떤 사람의 어떤 일,어떤 말 한마디,어떤 한 동작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학습,일,생활,수행에 영향을 주고,우리의 일생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의 한 생애에 영향을 주어 부지불식간에 어떤 힘이 자기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당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다른 사람은 모를 수도 있으니,반드시 당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 이렇게 강한 일종의 집착 관념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당신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반대로 말하면,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아주 깊은 오해,마음속에 깊게 자리한 오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당신에게 오해를 받은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그런 오해를 받고 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그 사람은 당신과 같은 상태가 아닐 것입니다.즉,이는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이는 우리 같은범인(凡人:평범한 사람)의 마음,범부의 마음 상태,범부 내면의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사람마다 다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이 반연(攀緣)하는 마음을 직면하면 그 것을 천천히 약하게 하면,점점 마음을 조정할 수 있고 ,지혜 및 자비로 바깥의 경계를 직면할 수 있습니다.육근(六根)이 육경(六境)에 닿을 때,기심동념(起心動念: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임)을 할 것입니다.우리는 반드시 진정한 실제적인 수행을 해야 하며,마음이 움직임을 시작할 때,우리의 육근(六根)에 중점을 두고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3)일을 통하여 마음을 연마하다

방금 외도(外道)에서는 “무상정”을 수행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심념(心念)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고 바뀔 수 없기 때문에 “무상정(無想定)”을 수행하여 억누르는 것입니다.즉,우리는 자기 내면이 외재적인 탐욕,노여움,아만(我慢),교만,질투,장애 등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심리를 억누를 수 밖에 없고 이런 과실이 나타나지 않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마치 땅에 많은 잡초가 자라나서 아무리 뽑아도 다 뽑아낼 수 없고 큰 바위로 그것을 눌러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게 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실제로 우리 마음 속에는 잡초가 아주 많습니다.우리 자신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탐욕의 풀,노여움의 풀,어리석음의 풀,의심의 풀… 이러한 풀은 한 두 번 뽑아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오늘 뽑아낸다고 해도 내일,모레 또 자라납니다.우리가 천 번을 뽑아내고 만 번을 뽑아내도 다 뽑지 못합니다.그것은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했고,풀 뿌리를 뽑아내지 못했으며,씨앗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일을 통해 마음을 연마하다”고 말합니다.이 말에서 “일”은 일종의 경계로 이 경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내면을 연마하고 외재적인 이러한 경계를 통해 우리 내면의 근본번뇌(根本煩惱: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탐貪,진嗔,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을 말함),수번뇌(隨煩惱:탐욕 등의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번뇌임),여러 번뇌의 씨앗이 야기될 수 있으며 그런 후에 다스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노여움이 비교적 크고,욕하는 것을 좋아하면 성질이 안 좋습니다.만일 당신이 혼자 방안에 있으면서 매일 사람들과 만나지 않고 접촉이 없으면 자연히 다른 사람과 싸움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다른 사람들이랑 접촉이 없는데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아마도 1년, 2년, 3년, 5년… 매일 매일 보는 것이 모두 실제적인 사물,화초 혹은 다른 동물이라면 자연히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사회에서 왜 많은 사람들이 화초를 키우고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을 좋아할까요?사람들과 접촉하여 교류하는 것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고 느껴 이러한 화초 등의 식물,작은 동물들과 함께하는 것이 낫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이는 현실의 문제입니다.왜 그럴까요?당신이 이러한 작은 동물과 대화를 하면,동물들은 듣기만 할 뿐 대답을 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옮기지도 못합니다.그렇지요?화초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감정,자기의 마음을 작은 동물,화초에게 전이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배우고 수행하는 사람들도 이렇습니다.그 내면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어울리고 싶지 않고 다른 이들과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어떤 큰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역으로 말하자면 만일 사람들과 만나고 서로 어울리고 소통하고 교류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되면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다른 사람이 당신의 방식을 무시하거나 당신의 말을 듣지 않고 당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까?우리가 자비심이 있는지,정력(定力:선정에 의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힘)이 있는지,계율이 있는지는 이때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이런 경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불법을 구현하고 불법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4)심성은 물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무상정”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내면의 이러한 생과 멸의 현상을 인식했습니다.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완벽하고 철저하게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무상정”을 수행하는 사람은 죽을 때에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수 있을 뿐이고 실제로 내면의 번뇌의 씨앗의 근원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며 제거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고통을 벗어나 즐거움을 얻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고 원만하여 조금의 집착도 없고 조금이라도 염오(染汚)하는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이 때 마음은 대단한 힘을 가집니다.바닷물이 아주 평온하여 조금의 파도도 없어 보이지만 몇 만 톤의 거대한 배를 지탱할 수 있습니다.비록 우리의 마음이 물처럼 평온하다 해도 그 힘은 어마어마합니다.힘은 평정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역으로 말하면,우리 내면에 만일 기복이 있고 흔들림이 있으면 힘은 곧장 영향을 받고 그것을 쓰는 것에도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그 외에도 사람과 일에 대해서도 방해를 받거나 나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심성은 물을 들어 비유할 수 있듯이,아주 청정하고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하며,마치 거울처럼 티끌 없이 청정하니 사람의 본성은 전혀 염오(染汚)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더러운 물을 점점 정화할 수 있으며,우리 자신의 번뇌의 마음,진성이 더러워진 마음을 정화할 수 있을까요?이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1년, 2년, 3년, 5년이라도 완전히 정화할 수는 없으며 오랜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며,불법의 정확한 지견의 지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5)오성(悟性)을 깨우치다

우리가 불법을 배울 때 각종 망상을 자주 하게 됩니다.우리가 이런 망상을 하여 여러 가지 번뇌가 일어나니 어떤 때는 이것을 고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하나씩 하나씩 정확히 다스리려면 아주 쉽지가 않습니다.

옛날 양무제(梁武帝)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그는 불교신자였습니다.그리고 두 명이 있었으니,한 명은 부대사(傅大士)라는 승려였고,한 명은 보지공(寶志公)선사였습니다.그들은 모두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양무제를 호위하고 있었습니다.어느 날,양무제가 부대사에게 <금강경>을 강론해달라 청을 하였습니다.이에 부대사가 법좌에 올라 <금강경>을 강론함에 주장자로 법상을 크게 한번 치고는 그냥 내려왔습니다.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어떤 경도 이야기 하지 않아 양무제는 의아해했습니다.양무제가 보지공 선사에게 오늘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이 있었는지,부대사께 잘못한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보지공 선사는 양무제에게 “폐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부대사의 강론에도 잘못이 없습니다.부대사는 확실히 강론을 마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이에 양무제는 “저는 한 마디도 듣지 못했고,부대사께서는 입을 열지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강론을 마치셨다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보지공 선사는 “<금강경>속의 금강은 하나의 비유,어떤 힘의 비유로 조금도 파괴하는 바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파괴한다는 것은 우리의 번뇌장(煩惱障),업장(業障)을 끊는 것입니다.반야의 지혜는 금강과 같아서 우리의 업을 끊을 수 있고,우리의 번뇌를 끊을 수 있습니다.부대사께서는 불법 지혜의 보검으로 우리의 번뇌와 업의 씨앗을 끊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며 이는 하나의 칼로써 두 개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돌을 가져다 크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진정으로 지혜에 의지해야만이 우리의 번뇌,업장을 해소할 수 있고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보지공선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양무제는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그야말로 많은 말이 필요 없으니,불법은 사람들이 깨우치게 하는 것이며,불법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불법은 우리의 오성을 일깨웁니다.오성이 깨어난 후에 지혜는 성장하고 늘어날 수 있습니다.지혜가 늘어나기 시작할 때 번뇌와 업이 비로소 없어질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이런 아주 미세한 내면의 번뇌와 업이 우리에게 큰 장애를 줄 수 있습니다.

6)지혜가 있어야 힘이 생긴다

어떤 때는 우리가 참회를 하고 싶지만 참회의 마음이 일지 않습니다.진정으로 참회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사력으로 참회한다(四力懺悔)는 것은 단순히 단어 몇 개만 읽으며 참회하는 척 하는 것은 머리를 숙이며 이러한 업장,번뇌장을 없애는 것만 못하고,아주 강한 지혜의 힘이 있어야만 번뇌와 업장의 씨앗을 없애 뿌리까지 뽑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번뇌와 업 자체는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일종의 힘,일종의 나쁜 힘이며 나쁜 장애,응어리입니다.지혜는 불법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불법의 본질이 바로 지혜,자비,복덕입니다.방금 우리 마음 속에는 끝 없이,주도면밀 하게 한결같이 아주 깊고 미세한 번뇌의 작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우리가 자주 말하는 “자르려고 해도 자를 수 없고,정리하면 할수록 더 어지러워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도리입니다.여러분은 끊어내고 없앨 수 없습니다.자신의 갈피를 정리할 때,오늘 정리를 다 했어도 내일 또 흐트러집니다.

사실,우리가 자기의 이러한 색신(色身)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자기의 피와 살,몸에 대한 인식에도 불법의 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세속적이고 외도적인 것들,혹은 스스로 근거 없는 상상의 방법으로 다스리게 되면 문제점이 생길 것입니다.우리 사람의 몸은 마음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육근,마음은 지혜,번뇌,자기의 업과 관련이 있으며,우리의 모든 행동,일거수일투족은모두 마음이 몸을 이끄는 것입니다.신체 자체에는 옳고 그름,좋고 나쁨이 없습니다.옳고 그름,좋고 나쁨도 모두 마음이라는 이 응어리 위에 있는 것이지 바깥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사람의 몸도 하나의 경계이고 마음이 따르는 하나의 경계입니다.

3.마음으로 노력하면 해탈을 얻는다

1)해탈은 자기의 마음속에서 시작된다

현실 생활 속에서 우리가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마음 속에 문제가 있을 때 쉽게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외부 환경을 탓하며,오늘 일을 성공하지 못하고 잘 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고 제삼자 때문이며,바깥의 환경 조건 때문이라고 느낍니다.우리가 잘 못하고 실패한 것은 모두 다른 사람 때문이고 다른 사람의 원인,기타 원인이라고 느끼기 쉽습니다.우리는 자기가 성공을 하면 그것은 자기의 원인이라고 항상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일을 성공하고 실패하게 되는 근본 원인은 자신에게 있습니다.외부의 경계,사람,사물은 일종의 연(緣)일 뿐이며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외부의 사람,사물은 우리에게 일종의 경계,일종의 현상입니다.이런 현상은 유형이든 무형이든지 간에 잠시 잠깐의 것일 뿐입니다.당신의 마음이 그것을 따를 때 사실상 그것이 두 번째 생각,세 번째 생각,하루,이틀이 지나면서 외부의 경계,즉 사람 사물이 또 변화하고 부단히,끝없이,무한히 변화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인과의 현상입니다.비록 변화하고 있다 하더라도 인과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왜 변화하는 걸까요?생과 멸이 있기 때문입니다.생각마다 모두 생겨나고 사라집니다.우리가 만일 이러한 경계를 깨달을 수 있다면 외재적인 일이 무상하다는 도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외적인 경계로 속박당하지 않을 수 있고,마음도 그렇게 외적인 득과 실,옳고 그름,성공,실패에 대해 연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오직 이러해야만이 우리의 마음을 불법에 쓸 수 있고,불법의 학습과 수행에 쓸 수 있습니다.해탈은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하고 돌파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2)구속의 해탈은 지혜로부터

왜 해탈해야 하는 것일까요?밧줄에 묶인 것 마냥 속박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한 사람의 손과 발이 묶여 있으면 아주 괴롭습니다.손과 발을 묶고 있는 줄을 풀면 자유로워집니다.마음도 마찬가지 입니다.당신이 번뇌,무명,업장으로 묶여 있어 방해를 받고 있으면 마음이 부자유스럽고 기쁘지 않으며,건강하지 않습니다.우리는 마음속의 그러한 번뇌,속박 등의 묶인 줄을 한 층 한 층씩,한 줄 한 줄씩,한 가닥 한 가닥씩 풀어내고,잘라내어야만 해탈할 수 있고 이러한 속박을 없앨 수 있습니다.

속박과 장애를 해탈하는 것은 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우리 몸이 묶여 있는 것은 밧줄이라는 구체적인 물건이 있는 것이지만 마음은 자신의 관념으로 닫히는 것입니다.단편적이고,잘못되고 고집스러운 인지가 자기를 속박하고 막혀서 마음이 잠기고 닫히는 것입니다.풀 수 없으니 마음을 열 수가 없는 것입니다.

3)정서를 초월하자

사람은 일생 동안 사회에서 몇 십 년을 살고 몇 십 년을 일 합니다.성공과 실패도 자기가 자기와 공을 차는 것이고,내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일 무한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세간의 여러 성공과 실패는 마치 우리가 연극을 한편 보는 것과 같습니다.이 연극에서 공연하는 득과 실,옳고 그름,은혜와 원망,모든 우여곡절,상해는 당연히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우리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이 영화가 한 시간 반이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것은 꿈 같은 환상으로 실재적인 것이 아니니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만일 제어를 잘 하지 못하면 마음은 영화 속의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의해 움직여 자신도 희로애락을 따라갑니다.불법의 관점은 다릅니다.보통 사람의 정서와 영화 속의 장면은 비교적 쉽게 서로 어울리기 때문에 희극을 보면 쉽게 즐거워지고 비극을 보면 쉽게 슬퍼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불법의 관점으로 보는 것과 다릅니다.만일 불법의 업과로 그가 왜 즐거워하고 슬퍼하는지를 분석해보면,즐거움에는 원인이 있고,슬퍼하는 것에도 원인이 있습니다.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말하자면 슬픔,즐거움,기쁨은 모두 세간의 정서이고 고통,즐거움,걱정,기쁨,포기는 다섯 가지 느낌 속의 감정으로 모두 직면하고 해결하고 초월해야 할 대상입니다.환희의 감정,쾌락의 감정도 잠시 잠깐의 것이고 일종의 심리적 기복으로 그것과 슬픔의 정서 자체는 두 가지 면을 가진 하나의 것이며 마음 속의 결함입니다.우리가 만일 이렇게 자기가 세간의 가치,의의를 인식할 수 있다면 자연히 일련의 경계를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반대로 말하면 내면은 이러한 경계로 좌지우지될 수 없습니다.

4.불법의 빛을 함께 나누자

1)나눔을 배우자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만일 다른 사람의 성공,기쁨,경험,즐거움을 부단히 나누고 다른 사람의 성취,성공에 대해서 깊은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공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스스로도 아주 즐겁고 기뻐하여 좋은 마음이 생길 것이며 고통을 느낄 수 없고 이러한 성취,기쁨,즐거움이 다른 사람의 것이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는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성취,사회의 다른 사람들의 여러 가지 성취에 대해,불가의 도반,수행도반의 성취에 대해서 나누기는 쉽지 않으며,다른 사람의 여러 성취,다른 사람의 경험과 기쁨을 나누기는 쉽지 않습니다.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불법은 법사와 도반에 의지해서 전달되고 구현되었고 또한 선지식,법사와 도반 이런 사람들의 모든 행위로 무엇이 불법인지를 해석하고 설명했습니다.무슨 뜻입니까?불법은 태양과 같이 대지를 골고루 비추고 만물을 따뜻하게 합니다.조그마한 풀이든 큰 나무든 모두 햇빛이 필요합니다.불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역할을 합니다.나무,풀,꽃도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하면 살 수가 없습니다.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우리의 생명은 마치 조그마한 풀 한 포기와 같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자신의 생명에 의의와 가치를 갖고 고통을 벗어나고 즐거움을 얻는 것에는 햇빛이 필요하고 불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반드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그러나 우리는 스스로도 햇빛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2) 나누는 마음을 갖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불법의 햇빛을 가질 수 있을까요?우리는 볼 수 있고,비교할 수 있습니다.다른 작은 풀,다른 꽃나무를 비교하면 우리는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예로부터 수행자들,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성취 그들의 생명의 의의를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수많은 고승전(高僧傳)과 많은 부처님의 전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성취,쾌락,희열은 우리가 죽은 후에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그것은 현세,지금,눈앞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감응을 얻을 수 있으며 가르침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부처님을 배우고 자량을 모으는 것은 부처님의 공덕을 나누고,선지식의 공덕을 나누고,동참도반,수행도반의 공덕을 나누고,부처님,선지식,수행도반의 경험,복덕,성취를 나누는 것입니다.우리는 삼보의 공덕을 나눌 수 있으니,자연히 자신의 공덕도 늘어납니다.우리 자신의 에너지는 비교적 작지만 더욱 강하고 큰 힘을 받아들이면 점점 자신의 에너지도 더 강해지고 커집니다.

불법은 햇빛,비와 이슬,전기와 같아서 우리는 한시도 그것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떨어지면 생활하기 어렵고 살아갈 수가 없으며 몸과 마음에도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불보살,선지식,법사님들,도반들 이런 구체적인 형상은 우리가 비교적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이러한 경계 자체가 불법을 묘사한 것이고,구현한 것이며 실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불가에 들어와 이러한 경계로부터 나누어야 합니다.우리가 나눔의 마음을 가지면 점차 자신도 지혜,자비,공덕을 누리게 되며 복덕(福德),자량(資糧)도 갈수록 많아질 것입니다.

편집:설원춘
태그:도반의 공덕과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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