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느끼고 깨닫다> 제5장 궁극신앙을 세우는 의의

Author:쉬에청 큰스님     기사입력:2016-07-04 12:49:59
2006년 10월 21일, 쉬에청(學誠)큰스님께서 제자들에게 <궁극신앙을 세우는 의의>에 관한 다섯 번째 법문을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법을 믿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바의 궁극적인 목표, 취지에 대한 믿음이며 최종목적에 대한 믿옴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1.궁극신앙과 경험 전승

1)궁극신앙을 세우자

우리가 절에 오는 것은 불법을 믿고,불법을 공부하는 것입니다.불법을 믿는 것은 아주 의의 있는 일입니다.그것은 하나의 형식이 아니며 외재적인 표면적 노력이 아니며,그런 척 하는 것,겉치레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모두가 한데 모여 경전을 읽고 예불을 드리고,토론을 하기도 하며,의견을 교류하거나 혹은 노동을 하는 것 등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이러한 것은 외재적인 형식이지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불법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완전하고,체계적이며,궁극적이고,철저한 심리 상태이며 일반적인 의의 상에서 소위 말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의미로 말하는 신앙은 하루에 향 하나를 피우고,부처님의 명호를 몇 마디 외우고,경전을 한 권 읽는 것 등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불법을 믿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바의 궁극적인 목표,취지에 대한 믿음입니다.현재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로 얘기하자면 최후에 대한 신앙,최종 목적에 대한 신앙입니다.이런 궁극적인 신앙은 경험의 기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반드시 경험을 갖고 지도하고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궁극신앙은 순수하게 이성적인 것도 아니며, 완전히 이성적인것도 아닙니다. 이성적인세계는 단지 형상이 있고 국한적인 세속 사회에 대한 이해이며 해석이기 때문입니다.불법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신앙은 경험의 기초 위에서 세우는 것입니다.경험은 무슨 뜻인가요?과거의 사람들이 이미 불법을 통해 수행하고,깨닫고,성불하여 쌓아 온 것,전해져 내려온 것,흘러 내려온 것을 말합니다.또한 이러한 경전 및 각종 주해는 우리가 믿는 대상 즉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어떻게 믿음이 생겨날 수 있고 어떻게 믿음을 공고히 하여 자기의 믿음이 약해지거나 감퇴하지 않게 할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이 점은 아주 결정적인 중요한 점입니다.

부처님은 이미 성불의 경지에 이르셨으며 궁극적인 목표를 실현하셨습니다.부처님은 32상을 구족 하시고, 80종호, 18종 공덕을 갖추시고,무량무변의 지혜,신통력,언변을 갖추셨습니다.우리가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하는 것인가요?아니면 깊게 사색하고 생각한 후에 다시 부처님을 믿고,불법을 배우고 귀의를 하는 것인가요?혹은 그냥 한번 해보는 것,이 것도 불교도라 불리고,삼보제자라 불립니다.하지만 자기 마음으로 믿는 불법이 갖고 있는 의미가 뚜렷하지 않고,목표가 명확하지 않고,흐릿하면 동력을 만들어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만일 우리의 최종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가장 큰 마음속 바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사사계승

불법을 배우는 것은 성불하기 위함이므로 우리는 자기의 노력과 수행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우리는 지금 많은 문제,번뇌,업,고뇌,장애를 갖고 있습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모두 함께 공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불법은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 한 세대 한 세대 조사 대덕을 통해 전수되어 온 것입니다.법의 의미는 전승 조사를 통해 전승되었습니다.모두의 노력을 통해 그것을 보존해 올 수 있었고,서책으로,경전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많은 장경(藏經),법보, CD, VCD가 유통되고 있습니다.이런 것은 어떻게 전승된 것일까요?모두 과거의 조사 대덕 여러분들이 경전을 얻으러 서행취경(西行取經: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 오다)등의 노력으로 남겨진 것입니다.물론 과거 많은 인도의 대덕이 중국에 와서 홍법을 하고 경전 번역을 하시기도 했습니다.만일 그러한 승보(僧寶),즉 고승대덕(高僧大德)의 노력과 확대가 없었다면 이러한 법보(法寶),즉 불법은 지금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 세대 한 세대,대대로 이어진 출가인이 불법에 근거하여 수련과 마음 수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출가한 법사는 선배들을 따라 배우고 선배들은 그 선배를 따라 배우고 이로 인해 수도(修道)하는 경험이 전수되고 쌓일 수 있는 것입니다.경전,저술,이론 자체가 바로 경험입니다.문자로 기재된 경험입니다.다시 말해,우리는 한편으로는 경전,저술,이론상에서 이러한 경험을 공부할 수 있고,또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경험을 배울 수 있습니다.실제경험은 우리가 현재 만날 수 있는 법사님,도반으로부터 나오며,법사님과 도반이 부처님을 믿고,불법을 배우고 수도(修道)하는 과정 중의 경험입니다.이런 경험은 그들이 자기 수행과정 중에서 쌓인 것으로 이 시기 경험의 누적에 지도성 즉,우리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지도하는 지도성을 갖고 있습니다.한 시대문제의 표현 방식이 다르지만 문제의 근원은 같습니다.

2.자신과 타인은 일체이니 인연을 소중히 여기자

1)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자아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한 사람을 이해 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고 아주 복잡한 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우리는 항상 사람과 사물을 명확히 보지 못하며 잘 이해하지 못하고,관통하여 보지도 못합니다.왜 이렇게 되는 걸까요?사실 아주 간단합니다.모든 사람의 몸은 똑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눈,귀,코,손,발,오장육부,전체적인 신체 형상,구조는 모두 같습니다.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공부한 것도 같습니다.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에 다녀야 합니다.심지어 모든 사람이 하는 말,생각도 모두 같습니다.그럼 다른 것은 어디일까요?바로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다르고 모든 사람의 행동이 다릅니다.우리는 왜 이런 것을 이해하려고 할까요?이런 것을 이해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남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고,남을 돕는 것이 바로 자기를 돕는 것이며,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남에게 있는 문제는 우리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 비교적 명확히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도 과거에 이미 이런 문제를 겪었다는 것을 말합니다.하지만 내가 지금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고 이런 문제가 무슨 원인으로 만들어졌고,어떻게 이런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지를 알면 이 때 우리 내면의 힘(內功)은 비교적 강해집니다.우리가 구체적인 모든 사람,모든 생명현상에 대해 그것의 원인을 찾고 그것의 과정을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모든 사람의 문제는 마음으로 회귀할 수 있습니다.사람의 마음과 불법이 서로 맞았는가 맞지 않았는가 하는 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즉,외재적인 사람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불법의 원리에 근거하여 인식하고,대우하고,검증해야 하며,불법에 의지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외부의 경계를 인식할 때 내면의 상태가 아주 평정하고,평온하여 기복이(起伏)없고 자유로우며 내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주 명료하고 청명하고 원만한 상태인가요?이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바깥에 존재하는 일과 문제에 대해 이해하고 명확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의 내면에는 기복이 생기고 동요하여 무명상태가 됩니다.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경계는 우리 앞에서 모두 뚜렷하지 않고 선명하지 않게 변할 것이며 무명상태,동요상태로 변할 것입니다.마치 먼지가 뽀얗게 쌓인 거울처럼 바깥에 아무리 좋은 경치가 있고,예쁜 꽃,좋은 옷과 과일 등이 있어도 거울에 투영된 것은 모호한 상태로 표현될 것입니다.

2) 스승을 따르는 것은 도반을 따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불법은 우리가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인식하고,어떻게 자기 마음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을지 알려줍니다.우리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기 마음에서 시작해야 하고,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자기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사람들은 똑같기 때문입니다.중생은 평등합니다.중생이 평등하다는 말은,당신의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내가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경험이 있고,방법이 있고,능력이 있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두 번째 사람,세 번째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줄 능력이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 자신의 경험,능력,방법이 부족하고 수행이 모자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어하고,다른 사람이 수행 과정 중에 얻은 경험을 공유하는 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우리는 도반이 우리에게 알려준 불법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유용하고,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이런 측면은 심사 숙고하고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현실세계에서는 분명히 우리보다 수행을 더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출가한 법사님이나 재가거사를 막론하고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우리 주변의 사람 중에 우리보다 낫고 우리보다 정진하고,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분명히 있을 것입니다.우리보다 정진하고 노력하고 성과도 비교적 높고,비교적 경험도 있는 이런 사람들의 경험은 바로 자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한 초등학생이 공부를 할 때 풀기 어려운 수학문제가 나오면 그의 친구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만일 그의 친구의 성적이 비교적 좋고 어떻게 이 수학문제를 풀지 안다면 그를 도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도반 사이의 문제는 마침 비교적 비슷하고 유사합니다.서로간에 가장 유익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종종 등한시 하고 수행 과정 중에 아주 수준이 높은 사람에게 지도 받아야 한다고 느낍니다.마치 자기는 초등학생 수준인데 대학 교수에게 지도 받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우리 자신은 실제로 그런 조건이 부족합니다.설령 우리가 조건이 충족됐다고 하더라도,이 수업을 알아 듣지 못할 지도 모르고,선생님의 실제 지도 능력도 발휘되지 못할 것입니다.

3)선지식을 만나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에 맞는 선지식이 우리의 문제 해결을 도와줍니다.우리는 원래 문제가 아주 크고 번뇌가 많기 때문에,선지식은 단지 이 문제에 맞추어서만 비교적 간단하고 유용한 것을 얘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반대로 만일 우리가 수행을 하는 마음의 힘이 부단히 강해지면 내면의 상태도 부단히 바뀌고,내면은 더욱더 미세하고 더욱더 청명하고 더욱더 섬세하며 민감해질 것이며,지혜와 자비는 더욱더 강해지고 자량은 나날이 구족해질 것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더 좋은 선지식의 지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이는 분명한 것입니다.

불법은 모두 인연을 말하고,인과를 말합니다.근대 정토종 고승 인광대사(印光大師)는 “세간과 출세간의 일은 인과라는 두 글자를 벗어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세간의 인과 출세간의 인과 모두 인과입니다.불법은 전체가 다 인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인(因)이 있어야 비로소 바깥의 연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만일 인(因)이 없고 오직 연(緣)만 있다면 과(果)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인이 있고 연이 구족하면 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불법을 배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법에 대해 희구하여야 외재적인 선지식을 만날 수 있고 도반의 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다른 각도로 말하자면 다른 도반,더 높은 수준의 선지식은 홍법을 하는 과정 중에도 서로 어울리는 사람을 끊임없이 모을 수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사람과 법의 어울림입니다.이는 더욱이 자신이 수행 학습하는 과정 중에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절실한 인도이지 이론적으로 심오한 연구와 탐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이론적으로 심오한 연구와 탐구는 또 다른 범주와영역입니다.이 범주와영역은단지 불교 이론(佛理)에 대한 이해일 뿐이지 진정으로 사람의 신앙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이끄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경험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4)스승과 도반을 따르며,인을 심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

경험 방면의 전수는 반드시 실제적인 경험이 있어야 하며,반드시 실제적인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또한 진정으로 체험한자가 있어야만 합니다.몸소 체험한 사람만이 이 길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곳을 통해야 하는지 알고,경험자만이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어떤 인과에는 어떤 인연이 필요한 것인지를 명확히 알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생명을 구하는 동아줄을 꽉 쥐고 있으면 구조 받은 수 없으며,우리가 강에 빠졌는데 돌을 끌어안고 있다면 똑같이 구조될 희망이 없습니다.돌이든 도아줄이든 여전히 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어떻게 해야만이 물가로 나올 수 있을까요?어떻게 해야만이 진정으로 구조될 수 있을까요?배에 몸을 의지하거나 배로 올라와야만이 구조될 수 있습니다.다른 사람들의 구조가 필요합니다.우리가 수영을 못하면 물에 빠져 죽습니다.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우리를 구조해 줄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어떻게 얘기할까요?우리가 문제를 찾고 문제를 해결할 때 만일 구체적인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고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치 이미 불법을 찾았고,불법을 가졌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러한 불법이 역할을 못하고,번뇌가 일었을 때 불법이 작용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만일 우리가 도반이라면 모두가 함께 수행을 열심히 할 때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과의 인연이 비교적 좋다면,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모두들 당신을 격려하고 지도할 수 있으며 당신은 물에 빠져 죽거나 큰 실수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이것에서 우리가 불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도반과 선지식의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3.불법은 마음의 법문이다

1)밖에서만 구하지 말라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 비교적 잘 진행된다면 내면에 평온,안정,자유로움,조화,즐거움이 항상 있을 것입니다.그것이 내뿜는 이러한 분위기와 기운은 다른 사람들,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전파도리 수 있습니다.이렇게 하면 우리도 부단히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불법의 이로움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조금씩 우리 자신의 내면에도 갈수록 고요와 평온,건강이 쌓여갈 것이며 적극적으로 높은 경계로 올라갈 것입니다. 

불법은 밖을 향해 구하는 것이 아니며,밖을 향해 구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밖으로 반연(攀緣)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닙니다.만일 우리가 늘 이 문제는 다른 사람의 일이라 여긴다면 이는 옳지 않습니다.만일 우리 내면에 그런 마음이 들면 그 또한 틀린 것입니다.내면에 응어리가 생기면 그것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사람과 일에 대해 아주 고정적인 생각이 있습니다.바로 집착입니다.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면 그 후에 어떻게 합니까?당신은 어떻게 자기 내면의 이런 생각을 풀어냅니까?외재적인 경계는 부단히 변화하는 것입니다.이 사람이 오늘은 이렇지만 내일은 여전히 이럴지는 모릅니다.우리는 한 사람을 볼 때 지나치게 좋게,아주 완벽하게 볼 수도 있으며,또한 너무 좋지 않게 엉망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그 사람이 오늘은 좋았고,오늘 이 일은 아주 잘했다면 단지 이 한 가지 일을 대표할 뿐입니다.아직도 많은 일을 당신은 모릅니다.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반대로 다른 어떤 안 좋은 사람도 당신이 그의 안 좋은 면을 봤지만 당신은 아직 그의 많은 일을 보지 못했고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이렇다면 우리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한 가지 일로 인해 그가 좋은 사람이다 혹은 나쁜 사람이다를 쉽게 판단해 버리니 이 자체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2)불법과 어우러지면 업이 청정해진다

모든 사람은 중생입니다.좋고 나쁨,선과 악은 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당신이 선업을 지었다면 과보가 좋을 것이며,당신이 악업을 지었다면,과보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모든 외재적인 행위결과는 업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사람은 왜 선업과 악업을 짓는 것일까요?바로 내면이 불법과 서로 어우러지고 있느냐에 따르는 것입니다.내면이 불법과 서로 어우러지면 그 사람의 모든 업은 청정한 것이고 결과도 청정합니다.만일 무명,번뇌와 서로 어우러지면 그 사람이 짓는 업은 염오(染汚)되고 결과도 염오됩니다.

상대방의마음이 염오된 상태에 있어 업이 청정하지 않을 때가 바로 우리가 해결을 해줘야 할 때이며,우리가 도와줘야 할 때이며,우리가 이끌어주고 힘을 들여 법을 써야 할 때입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운다고 해서반드시 많고 또 좋은 경계(境界)만 있다는것은아닙니다.만일 좋지 않은 경계를 만났다면 우리는 이 불법이 영험한지 아닌지를 의심합니다.우리가 이렇게 오래 배웠는데 어떻게 아직도 이러한 눈에 거슬리는 일을 보고 만날 수 있겠습니까?사실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 내면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며 한 단계 더 올라가는 것은 아주 쉽지 않은 일입니다.학교를 다니며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려면 1년간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불법 안에서 한 단계를 오르려면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내면의 진실된 노력이 필요합니다.당신이 1년을 배운다고 한 계단을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만일 진정으로 발심하고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당신은 유급될 것이고 10년을 배워도 계속 1학년일 수 있습니다.

4.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

1)선과 악의 기준

세간의 모든 일은 불법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면 본질적으로 모두 진정한 의미의 선은 아닙니다.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불법에서 얘기하는 선과 선악의 “선”은 바로 우리가 궁극목표에 대한 신심을 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세간의 많은 선은 사실 외재적이고 국한적이고 국부적인 선입니다.게다가 많은 요소의 영향을 받습니다.이런 행위 혹은 행위의 결과는 환경,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일단 이런 조건이 부족하고 환경과 멀어지면 좋은 일이 아니고 선의 행위가 아니게 됩니다.세간의 선은 모두 상대적이며,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이런 일들,결과는 어떤 사람한테는 선이지만 또 다른 사람한테는 악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악에 대한 불법의 개념은 이렇게 범주를 정하지 않습니다.불법 속의 선악은 자기의 고락과 하나로 연계되어 있으며,자기 내면의 자유로움,자유롭지 않음과 하나로 연계되어 있고 내면의 안락함과 안락하지 않은 것과 하나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회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에겐 좋은 보답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됩니다.왜 좋은 사람에게 좋은 보답이 없을까요?불법에 근거해서 말하자면,좋은 사람은 반드시 좋은 보답을 받게 됩니다.세간법으로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보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왜 그럴까요?세간의 선은 유루선(有漏善:세속의 범부가 일으키는 선, 즉 번뇌를 가진 선)이기 때문입니다.유루선이라 함은 바로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점이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그래서 “좋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보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인 것입니다.하지만 만일 불법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좋은 사람은 반드시 좋은 보답을 받게 됩니다.불법은 당신 스스로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간법은 당신의 행위의 결과에 근거해서 판단을 합니다.행위결과로 판단 하는 것이 반드시 공평하고 공정한 것은 아닙니다.어떤 때는 공평하고 어떤 때는 불공평합니다.불공평하고 불공정할 때 당신은 직장 혹은 사회에서 늘 자기한테 불공평한 일이 발생한다고 느끼게 됩니다.세속사회의 공평,공정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하물며 우리가 남을 돕고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일을 하는 것 자체로는 보답을 구할 수 없으며 조건을 붙일 수 없습니다.만일 우리가 좋은 일을 하여 조건을 붙이고 보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게 무슨 좋은 일입니까?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고 많은 조건을 붙였기 때문에 게다가 세간에서 유루선,국한적인 선 안에서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자기가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결과에는 종종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불법은 완전히 이와 다릅니다.

2)출가와 출세,둘 다 이루긴 어렵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일체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와 원만한 선법을 추구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한 사람이 세간의 여러 가지 성취,명예,지위,재물,매력 등을 다 체험하여 일체의 이러한 모든 것을 자기 생존의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있고,자기의 흥미를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불법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길러낼 수 있습니다.만일 우리가 한 방면에서는 세간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러 성취에 대해서 아주 관심을 갖고 매우 집착하지만 한편으로는 불법에 대해 믿음을 갖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세간의 성취와 결합시키려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우리가 세간의 성취를 추구하는 목표로 삼으려 하고 불법의 성취도 추구하는 목표로 삼으며 불법과 세간법을 결합시키려 한다면 즉,여러분이 세간에서 성취를 얻고,불법에서도 성취를 얻고자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석가모니 부처님이 왜 출가를 하셨겠습니까?그가 한 나라의 국왕이자 한편으로는 부처님이 되셨다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성불하고자 한다면 국왕이 될 수는 없고,국왕이라면 불법에서는 성취를 얻기가 힘듭니다.국왕이 되면 정사를 돌보고 국가를 관리해야 합니다.국가를 관리하고,사회,기업을 관리하는 것에는 일련의 관리 방법이 있습니다.성불은 내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세간법에서 하는 일과는 다릅니다.당신이 업무를 처리하고 일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재적인 실제 상황에 근거해서 처리를 해야지 내면에 근거해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즉,당신이 내면의 경계를 외재적인 경계와 원만하게 통일시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특히나 당신이 세속사회에서 한자리를 하고 있을 때,당신은 직무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해야지 당신 본인의 내면에 근거해서 일을 처리하면 안됩니다.그러면 이 직무 자체는 또 많은 직무의 영향을 받아 좌지우지 되어,많은 상황에서 무력하게 되어 당신이 어떻게 하고 싶다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왜 우리는 불법을 배워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까요?아주 중요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불법을 배운 후에,내면에 불법이 생기면 우리가 공부하고 일하고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고 지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런 지도는 한계가 있습니다.절대적으로 한계가 있어 원만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고대 조사 대덕을 보면,진정으로 불법에서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온 마음을 다해,전 과정을 통틀어,완전히 다 돌입해야 합니다.우리가 만일 세간의 여러 성취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이 없다거나 혹은 관심이 나날이 옅어진다면 그것을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로 삼지 않아야 더욱더 깊은 생명의 단계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생명 단계의 깊은 곳에는 더욱더 갈구하는 바가 있어서 정신상의 가치와 의의가 필요합니다.한 사람이 돈이 없을 때는,돈을 갖고 싶고,재물이 갖고 싶어집니다.그 사람이 큰 기업을 이끄는 기업가,억만장자가 된 후에는 재물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그가 필요한 것은 정신적인 가치와 의의이며 그가 행하는 좋은 일은 정신세계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재물이 충분해지고 높은 지위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신적인 가치와 의의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이는 명백히 늦은 것입니다.

세간에서 오직 몇몇 사람들만이 일생에 그렇게 많은 물질을 쌓을 수 있습니다.그가 현세에 큰 기업을 이끄는 기업가가 되고,경영자가 된 것은 현세의 복 때문이 아니라 전생의 복이 쌓여 온 때문입니다.그가 과거에 선업을 지었기 때문에 현세에 이렇게 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여러분 모두도 똑같이 사람이고 한 사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는데 왜 어떤 이는 국왕이 되고 어떤 이는 거지가 되고 어떤 이는 억만장자가 되고 어떤 이는 무일푼인 걸까요?이는 모두 사람의 복,사람의 업과 관계가 있습니다.우리가 한 평생을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이 한평생을 노력하는 것도 단지 하나의 인연일 뿐이며,부차적인 조건일 뿐이지 주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3)마음이 경지와 서로 어울리다

우리는 정신과 체력,시간을 정인(正因)을 심는 것에 쓰고,성불의 정인을 심는 것에 쓰고 이러한 방면으로 사색하고 노력하고 만들어 내야 합니다.우리가 자기 주변의 이런 사람들의 행동의 가치를 인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우리가 자기 주변의 이런 사람들의 행위가 이와 같고,이처럼 미묘하고,이처럼 청정 장엄함을 인식했을 때,불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비교적 깊어집니다.당신의 내면이 어떤 경지이냐에 따라 그 경지와 서로 어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내면이 청정하면 청정한 경지에 대해 아주 쉽게 서로 어울릴 수 있습니다.우리 내면이 만일 청정하지 않으면 청정하지 않은 경지와 서로 쉽게 어울리고 청정한 경지와는 어울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삼보,불법,도반과 서로 쉽게 어울리지 못할 때,그것은 바로 우리 내면에 번뇌가 있고 내면에 혼탁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말합니다.우리가 그것과 서로 어울리느냐 못 어울리느냐는 자신이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서로 어울리는 것이 불법이고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세간법입니다.그래서 우리는 늘 자기의 행위가 불법과 서로 어울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우리 자신의 발심을 강조하고 동기를 보리심(菩提心)위에 세우려고 합니다.왜 이렇게 강조하는 것일까요?중심을 벗어나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일을 하는 것에만 주목하고,우리 내면의 상태가 어떤지를 홀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5.성불(成佛)의 계단

1)일을 하는 목적

절에서 법회를 하는 것도 좋고 서로 교류를 하는 것도 좋고 일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일을 하는 목적은 단지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자주 이야기 합니다.일을 하는 목적은 우리가 자량을 모으기 위해서 이고일을 하는 목적은 또한 법을 실천하는 것에 있으며 법이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구체적으로 체현 되는 것으로 일을 하는 과정은 공업(共業:공동으로 선악의 업을 짓고,과보를 받는 것)을 모으는 것입니다.세간에서 일을 하는 목적은 성취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무엇을 성취하나요?방금 제가 말한 명예,재물,지위,사업상의 성공 및 가정,사회에서 짊어지는 자신의 여러 가지 책임입니다.이는 세속사회인이 일을 하는 목적입니다.이런 목적은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단지 세간의 목적일 뿐이며 기껏해야 우리 스스로 조금 더 좋은 도구,조건을 갖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세속사회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성취는 단지 미끼일 뿐입니다.이 미끼는 만약 당신이 잘 대해주지 않으면 엇걸리고 자신을 망가뜨려 아주 무서워질 수 있습니다.세간 생활,일,존재에서 사람들은 모두 장기적으로 존재하고 싶어합니다.심지어 무한히 존재하고 싶어합니다.즉“생명무한”입니다.존재하고 싶지 않다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잘 죽는 것이 힘들게 사느 것보다 못하다.사는 것이 언제나 죽는 것보다는 낫다.”만일 한 사람이 살고 싶어하지 않아하면 그것은 그가 실제로 너무 힘들고,방법이 없어,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자신이 이미 멸망의 끝에 도달하고 자신이 파괴되는 길을 걷고 있어 이미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아 멸망이라는 이런 선택을 하고 길을 취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일부러 이런 길을 선택하고,자아 파괴의 길을 선택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이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세간의 어떤 이들은 마지막에 자아 파괴를 향해 나아갈까요?더 많은 상황에서 그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길을 걷고 자신과 타인,사회를 정확하게 잘 대하지 못하고,자기의 행동의 의미를 모릅니다.완전히 모릅니다.그 사람이 자기의 이런 행동이 사회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어쩌면 그 사람이 알면서도 무서워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알고도 무서워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불법의 인과 법칙은 어떤 인이 어떤 과를 가져오는지,선인은 즐거운 과보를 가져올 수 있고,악인은 절대적으로 고통스런 과보를 가져오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세간과 출세간은 모두 인과로 결정됩니다.

2)도에 이르는 차제를 실천하자

우리는 자아 성취의 길,자아 해탈의 길,궁극적으로는 성불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이런 길,방법을 선택하면,우리는 반드시 성취할 것입니다.우리가 하는 행위의 의의는 바로 세간과 다릅니다.도차제를 공부하는 것도 바로 이런 선택입니다.내가 이 경전 문구와 이 경론을 한 편씩 읽고 모두 함께 토론하는 것으로 도차제를 다 배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당신이 경전을 덮고 나면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하는 일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를 모르고 내면에 확정된 결정이 없으면 절 문을 나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스스로 모르고,집으로 가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이렇다면 무슨 도차제라 부르겠으며 무슨 불법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도차제가 우리 내면에서 진정으로 작용을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뚜렷하고 명료할 것이며,한 걸음 한 걸음 어떻게 걸어나갈지 자신의 행위,조그마한 것 모두 다 명확하고 틀림없어 질 것입니다.우리는 지금 현재 이 시각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내일,내년,우리의 미래는 더욱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장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고 이후에 수행하러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이것은 또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우리가 지금 이 순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지금 이 순간의 경지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데 미래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희망이 있겠습니까?희망은 절대적으로 미미할 것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도차제(道次第)를 배우면 세간의 생사 윤회의 인연,과보,과정,순환의 규율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벗어나야만 합니다.이런 윤회의 규율을 벗어나고 해탈의 규율로 가고 성불의 규율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불의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도차제에 힘을 써야 하며,우리의 마음,언어,신체가 만들어 내는 것,신(身),어(語),의(意),삼업(三業)이 반드시 불법의 규율,법규에 부합해야 하며,도차제의 요구에 부합해야만이 성공할 방법이 생깁니다.우리의 모든 몸과 마음,모든 행위는 다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힘이 너무 약해집니다.우리는 자아 완선,자아 향상,궁극적인 성불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그리고 스스로 타락하고 괴멸하고 삼악도(三惡道)에 빠지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6.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을 발심하라

무한생명의 의미는 생명의 존재는 무한하다는 것,무한생명의 존재는 우리의 생명이 무한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생명이 무한히 존재할 수 있는 의의는 어디에 있습니까?존재한 후에는 좋습니까?만일 당신이 괴롭다면 무한 존재인 당신은 무한한 고통을 갖게 됩니다.만일 당신이 즐겁다면 당신은 무한한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즉,당신이 만일 즐겁다면 무한한 존재인 당신은 무한히 즐거우니 아주 좋습니다.만일 괴롭다면 당신의 생명은 무한히 괴로울 테니 이는 아주 좋지 않습니다.우리는 무한 생명 존재 가운데 무한한 괴로움과 즐거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우리는 무한한 발심에 의지하여야만이 무한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즉,우리의 발심도 반드시 무한해야 하며,최초의 발심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합니다.우리는 오직 부단히 발심하고 부단히 성불할 때까지 수행하여야 자기의 복덕,지혜,자비의 자량이 비로소 부단히 누적될 수 있고 비로소 유한에서 무한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으면,비록 우리의 무한한 생명이 이어지고,과거에 있는 습관이 연속해 왔더라도 우리의 발심,생명 개선에 대한 행위는 미미해질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무한한 생명 속에서 인을 심을 수 있지만,우리가 정인을 심을 때 또한 많은 유사한 인을 심기도 하고,많은 악인을 심기도 합니다.역으로 말하면,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게 된 이상 무한한 생명 속에서 우리의 괴로움은 단지 조금 줄일 수 있을 뿐이며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단지 무한한 생명 과정 중에서 어떤 한 단락 안의 한 부분의 괴로움만 해결할 뿐이고 철저히 그것을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철저히 무한한 생명 속의 이러한 고통을 떨쳐버리려면 오직 성불의 정인(正因)만이 방법이 있습니다.만일 성불의 정인이 아니라면 당신이 떨쳐버리려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일생의 시간은 유한한 것입니다.몇 십 년 우리가 매일 노력해도 정인을 얼마 심지 못합니다.하물며 자기의 마음 조차도 종종 장악하지 못합니다.더 많은 상황에서 하나의 마음 상태입니다.마음이 좋은 상태일 때는 쉽게 발심을 합니다.마음이 좋지 않을 때는 발심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마음이 좋을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마음이 좋지 않을 때는 공부하고 싶지가 않습니다.많은 상황에서 자기와 타인 서로간의 마음이 작용을 하여 진정으로 이 보살의 마음을 논하는 것은 아직도 너무나 요원한 일입니다.

보살이 발심할 때,사람과 사람의 관계,사람과 일의 관계,사람과 사물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여 자타가 둘이 아닌(自他不二)하나임이아주 명확합니다.무엇을 가리켜 “무연대자(無緣大慈),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부를 까요?바로 이러한 도리입니다.세간에는 여러 고난이 있고,사람에게는 여러 문제가 있으니 우리는 발심을 해야 합니다.만일 모두가 문제가 없고,모두들 부처고 보살이면 이 세상은 청정하고 원만하여 우리가 발심할 필요가 없으며,모두는 이미 너무나도 좋은 상태일 것입니다.문제,장애,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가 발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7.타인을 이롭고 불법의 도리에 따라 듣고 사유하라

1)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대하라

우리가 지금 불법을 배우고 도차제(道次第)를 배우는 것은 자기의 발심을 키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외재적인 사람,일,사물에 대한 인식을 키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이 인식이 아주 중요합니다.불법의 언어로 말하자면 바로 정견(正見)입니다.정견의 수립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친구가 아주 많고,어떤 사람들은 외톨이 일까요?당신이 다른 사람을 잘 대해 줄 수 있으면 자신을 잘 대할 수 있습니다.타인을 잘 대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잘 대하는 것입니다.타인을 잘 대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심이며,다른 사람에 대한보살피는마음이며,일종의 자상함,배려,민감함입니다.

우리가 만일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에 대해 민감하지 않고,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우리에게 가장 잘 하는 사람,매일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우리 자신의 선한 마음을 내기 어렵다면 낯선 사람들,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 대해 발심하여 그 사람을 도와주라고 한다면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이는 불가능합니다!이는 단지 자기의 이상일 뿐입니다.진정으로 당신이 그 사람을 도울 때 그 사람과 접촉할 때 그가 당신을 욕한다면 그래도 당신은 그 사람을 돕고 싶겠습니까?아마도 아닐 것입니다.불가능한 일입니다.자기 집안의 사람들,부모,형제,자매 그리고 직장의 사람들,동료,상사,부하직원,우리 절 안의 봉사자들,여기에 오는 불교신자,관광객,우리 절의 법사님들까지도 이러한 경계 안에서 스스로도 불법을 쉽게 꺼내어 쓰지 못하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길이 아닌가?

2)불법의 도리에 따라 불법을 듣자

우리가 절에서 수업을 듣고,불법을 들으면 어떤 마음을 갖게 됩니까?내가 오늘 와서 무엇을 듣고 싶다고,무엇을 얻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마음을 바꾸어 절 안의 법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귀 기울여 듣고,우리에게 어떤 도리를 알려주시는지,무슨 문제를 지적해 주시는지,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법사님이 말씀하시는 이러한 내용이 자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자기는 이러한 문제들이 있는지 없는지,자기는 과거에 유사한 상황이 있었는지,이런 지도적인 의견,견해는 앞으로 자기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만일 도움이 된다면 앞으로 참고할 수 있도록,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그렇다고 자기가 무엇을 듣고 싶어하고,와서 들었는데 이 법사님이 말씀하신 것이 당신이 듣고 싶었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이 법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거나 혹은 이법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경전을 갖다가 대조해 보고 그분이 하신 말씀이 경전 속 어떤 부분에 있는지를 맞춰보라고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만일 이렇게 하고 있다면 당신은 방향을 잘못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불법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신더러 와서 심판을 하라는 것이 아니며,말씀하시는 내용이 어떤 부분과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이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일입니다.만약 이러한 척도를 잘 못 들이대면 당신이 절에 와서 법문을 들음에 있어 큰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우리는 지금 어느 경전의 어떤 단락의 문자를 해석(消文)하는 것이 아닙니다.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하물며,우리 자신의 집에도 이런 경전이 있고 스스로도 보고 이해할 수 있다면 절에 와서 법문을 들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절에서 불법을 듣는 것 자체가 일종의 수행 과정이며,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며,우리 내면의 약점,번뇌,문제 및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대면하고 해결할 것인 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그런 후에 모두들 공업(共業)을 짓고 선한 인연을 맺으면 모두들 조금씩 높은 경계로 올라갈 수 있고,갈수록 안정되고 배우면 배울수록 좋아질 것입니다.

 

제5장에서 우리는 궁극신앙을 세우는 의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이 주제를 잘 이해해야만이 무한 생명에 대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다른 각도로 보자면 무한 생명에 대한 개념을 진정으로 세우기 어려우면 자연히 궁극신앙에 대해서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여 그리 명확하지 않을 것입니다. 

편집:설원춘
태그:궁극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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