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느끼고 깨닫다> 제4장 욕망의 즐거움과 법의 즐거움에 대한 성찰과 사색

Author:쉬에청 큰스님     기사입력:2016-07-04 12:49:23
2006년 10월 14일 쉬에청(學誠)큰스님은 제자둘에게 <욕망의 즐거움과 범의 즐거움에 대한 성찰과 사색>이라는 주제로 범문을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왜 불법을 오래 배울수록 도의 마옴을 잃어버리는가? 욕망의 즐거움이 무엇인가? 범의 즐거움이 무엇인가? 오욕은 어떤 해로움이 있는가? 어떻게 사욕과 탐심을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깨달옴을 주셨습니다.

1.신앙이 악화하는 원인:

오늘은 수행 중에 자주 보게 되는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불교도 중에서 특히 신앙심이 강하고 불법을 구하는 믿음이 굳건한 많은 신도들에게서 불법을 몇 년 배운 후에 신앙이 더 이상 강화되거나 공고해지지 않고 오히려 약해지고 퇴화하는 현상이 있습니다.불법을 구하는 믿음은 갈수록 굳건해지지 않고 오히려 나날이 퇴색해가기도 합니다.이는 우리가 자주 접하고 보고 듣게 되는 문제입니다.더욱이 자기 주변의 사람과 일에서 자주 발생합니다.우리 자신에게서 일어날 수 도 있습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웠으면 나날이 믿음이 강해지고,나날이 착실하고 견실하게 길을 잘 걸어나가고 안정되게 길을 나아가야만이 올바른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 발생 및 문제의 정도가 심해지는 원인은 많습니다.어떤 것은 수도(修道)하는 방법과 경로,차제를 찾지 못해 입문하기 어렵고,어느 한 법문을 입문해도 깊이 하기는어렵습니다.불법을 믿는 것을 통속적인 민간 신앙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많은 민간의 사당에서는 여러 신을 모십니다.이런 신도 보호,비호의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우리가 불교를 믿는 것은 단지 이런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부처님께서 널리 알리신 바로서의 불법이란 우리 눈앞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만일 눈 앞의 이러한 하찮은 문제만을 해결 한다면,보통의 신 심지어는 세상의 선인들도 다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부처님을 믿고,불법을 믿고 수도(修道)하는 것은 그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며,무한한 생명이라는 시각으로 부처님을 믿고,불법을 배우며,수도(修道)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신앙심을 잘 세우지 못하고,불법을 구하는 도심(道心)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불법을 듣고 사유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불법에 대해 깊게 듣고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깊게 수행하려면 그 어려움도 당연히 큽니다.

사람들의 신앙심이 약해지고 불법을 구하는 도심(道心)을 잃는 원인은 실천하고 수행하는 방법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자기는 아주 열심히 수행을 하고 싶지만 수행을 할수록 힘들고,수행을 할수록 불법의 즐거움,불법의 효용을 체득하기가 어렵습니다.스스로 수행을 하고 싶은 것과 어떻게 수행을 잘 하느냐 하는 것은 다릅니다.스스로 수행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의 발심으로,내재적으로 자아가 요구하는 바일 뿐이며,어떻게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지,질서 정연하게 차제대로 단계별로 수행을 진지하게 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사람들의 신앙이 약해지고 불법을 구하는 마음이 약해지는 원인은 자만심,나태함에 있습니다.나쁜 습성을 항복(降伏)하고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우리의 자만심이 작용하기 때문에 내재적으로 사람과 일과 사물,그리고 불법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합니다.자만심 때문에 자연히 불법을 자기의 마음 밖으로 거리를 두고 자신을 불교의 문 바깥으로 두는 것입니다.나태함 때문에 우리는 집중,전념할 수가 없어 유한하고 귀중한 짧은 시간도 불법을 배우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데다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떻게 해내실 수 있었을까요?역대의 조사,대덕은 어떻게 해내실 수 있었을까요?부처님은 늙고 병들고 죽는 생명의 블랙홀을 보시고 더 할 수 없는 울림을 느꼈습니다.생과 사를 벗어나고,궁극적인 해탈의 보리대도(菩提大道)를 찾기 위해 세상에서의 자기의 모든 공명,이익,성취를 결연히 내려 놓으시고 자신의 모든 몸과 마음,생명으로 불법을 실천하셨습니다.우리 자신과 비교해볼 때,우리는 모든 생명,몸과 마음으로 부처님처럼 불법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이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을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입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은 간단한 하나의 개념에 그쳐서는 되는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결심하여 공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단지 그럴듯한 명분 만을 내세우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발심인 것입니다.

2.욕망의 즐거움(慾樂)과 법의 즐거움(法樂)

1)오욕(五欲)의 해악

세상의 사람들은 제각각 추구하는 바가 있으며,각양 각색의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오욕에 대한 방종,추구는 잠깐의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불법에 대한 희구와 실천은 영구적이고 궁극적인 즐거움을줄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으면 물론 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돈이라는 것은 또한 많은 재앙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이런 말이 있습니다.“사람은 돈 때문에 죽고,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 ”.재물은 종종 사람들에게 많은 불행과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을 안깁니다.그것은 불법과는 서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미색은 어떻습니까?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수도(修道)하는데 있어 훨씬 더 큰 장애물입니다.세상의 모든 사람들,많은 은원(恩怨)의 대상,사랑하는 사람과 증오의 대상,사랑하는 사람과 원수,이 모든 것이 미색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입니다.미색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골칫거리를 가져다 줍니다.심지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수많은 번뇌와 심각한 고통을 야기하여 스스로를 욕망의 바다,거대한 파도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합니다.이는 곧 재물이든 색이든지 간에 그 안에 감춰진 고통과 불행은 일반적으로 불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명예도 이와 같습니다.“명예가 가는 곳에 비방도 따라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높이 오를수록 떨어지는 것도 빠르고 상처도 큽니다.그렇다면 이런 세간의 공허한 이름에 대한 탐심과,추구도 우리가 도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아주 큰 장애물입니다.

오욕에서 네 번째 욕망은 식탐입니다.현대인은 음식,식품에 대해 매우 따지며,먹을 것도 과거보다 훨씬 풍부해졌습니다.안타깝게도 현대인의 질병도 과거보다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속담에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화(禍)는 입에서 나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사람들은 자신의 위장이 소화 시키지 못한 많은 것들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먹을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먹어버렸기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

다섯 번째 욕망은 잠입니다.수면은 아주 심각한 욕망입니다.어떤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을 때 종종 잠을 자려고 합니다.어떤 사람은 “먹는 것만 밝히고 일은 게을리한다” 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어떤 사람은 우리가 잠을 자는 것에는 어떤 과실도 없으며 어떤 잘못도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표면적으로 보면,잠을 자는 것은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사실 자신에게는 아주 큰 손실입니다.우리도 모르게 이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며,게다가 게으른 습관을 기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간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다섯 가지 욕락 즉,다섯 가지 욕망의 쾌락은 비록 조금의 쾌락이 있기는 하나 사실 고통이 더 많으며,고통이 더 크고,더 깊습니다.갖가지 일,갖가지 추구로 얻은 아주 조금의 쾌락,그 안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하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선법의 욕망을 기르자

천여 년 동안 모든 성현,즉 세간의 성현과 불교 안의 성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다섯 가지 욕락이 자신과 자신의 목숨에 대해 큰 영향을 끼치며 심지어 생명에 위험을 주며,우리가 더 잘 흐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시시각각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어떻게 하면 스스로 욕망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어떻게 하면 욕망의 그릇된 길,깊은 수렁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불법에 의지해야 합니다.선법욕에 의지해야 합니다.

선법욕은 사람에게 법락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오욕은 단지 욕락 즉,욕망의 쾌락만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선법욕은 선법의 쾌락입니다.선법의 쾌락은 정신적인 쾌락입니다.자기의 번뇌를 항복하는 쾌락이며,내면에 지혜를 얻고 진리를 깨닫는 쾌락입니다.세상의 한 현인 군자가 그의 모든 행동에 도덕 풍습을 담을 수 있으며,인애 정신을 구현할 수 있으면,비단 자기의 몸과 마음이 기쁠 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또 불법에서 말하는 정지,정견,정념,정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법희(法喜)와 즐거움을 안겨다 줄 수 있습니다.우리가 학교에서 성현의 책을 많이 읽어 많은 도리를 이해하고,절에서 많은 불교 경전을 읽어도 자신에게 법희와 법락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우리가 법당 안에서 참선을 하고,경전을 읽고,염불을 하여 내면의 조화를 얻을 수 있고,안전과 희열을 얻을 수 있다면 세속 사회에서 각종 욕락이 다다를 수 없는 경계와 심경을 갖게 될 것입니다.우리 도반 사이에서 서로간에 경건,공경,수용,양보하고,서로 포용하며,서로 교류하고 서로 격려하며,자비희사(慈悲喜舍),남을 돋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이런 정신,행위,느낌은 더욱이 찾기 쉽지 않으며 매우 얻기 어려워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보석과도 같으며,자기와 도반 서로간에 자기의 몸과 마음,생명으로 불법을 실천하는 가장 진실한 묘사이자 가장 진실한 반영,가장 현실적인 결과 입니다.

3)불법으로써 자신을 점검하자

우리는 열심히 교리(敎理:불교의 원리나 이치)를 배우고 교법(敎法:부처님 사상의 교육)을 실천해야 합니다.불법은 반드시 영험하며 반드시 검증 받을 수 있으며,우리는 반드시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역으로 말하면,만일 자신의 욕락을 단속하지 않으면 이는 곧 범부의 행위이며,일반인의 행위입니다.일반인의 행위는 모두 육도에서 윤회하는 가운데 순환합니다.물론 우리는 불법과 서로 어울리지 않고 이익이 없으며,자아학대 같은 그런 고행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진정한 고행은 생명의 해탈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석가모니 부처님은 비록 초기 6년 간 고행을 겪으시고 최후에는 결국 포기를 하셨지만 그 원인은 불법이 중도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많은 곤란,문제,좌절,실패까지 만났다면 그때 우리에게 여전히 신심,용기가 있어 자기를 마주하고 불법을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까요?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곤란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문제가 발생하지 않거나 좌절하거나 실패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이 모든 것들은 가능성이 있으며 심지어 자주 발생하기도 합니다.속담에 인생에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십중팔구라 했습니다.우리는 수 많은 일 들을 다 자기의 바람대로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자신의 뜻에 만족할 수 없으면 또 어떤가?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우리가 만나는 일들,우리가 하는 일이 불법의 기준에 부합하는지,부처님의 바람에 부합하는지,조사 대덕의 뜻과 부합하는지를 봐야 합니다.자신의 뜻,바람과 부합하는지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만일 자기의 행동이 부처님,조사 대덕들의 바람과 뜻에 부합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때 바로 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부처님,조사대덕께서 우리가 생과 사를 벗어나 보리도를 갈 수 있도록,궁극적으로는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뜻,바람이 다만 눈 앞의 작은 은혜,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모두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이런 것은 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문제입니다.이런 문제가 스스로 불법이 영험한지 여부를 느낄 수 있게 해줍니까?우리 스스로의 느낌에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느낌은 불법과 연계될 수 없고,단지 지금 닥친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정서상의 느낌일 뿐이며,자기의 정서상의 느낌,편안함,불편함,고통과 즐거움 등의 느낌으로 자기가 불법을 배우는 것에 발전이 있는지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며 이것으로써 불법의 기능과 이익을 검증하게 되니 자연히 우리는 불법과는 더욱더 멀어지게 됩니다.

방금 이런 것을 말한 주된 목적은 바로 불법이 우리가 욕락을 추구하는 것에서 법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전환하게 하며,우리의 선법욕을 기르고,자기의 오욕에 대한 추구,탐욕,집착 등 마음 속의 상태와 문제를 구속,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탐욕은 세가지 독 중의 하나입니다.세가지 독의 첫 번째는 탐욕으로 재물,색,명예,음식,잠을 나타냅니다. 

3.선법에 대한 욕망으로 사욕을 다스리자

1)부처님의 자비와 정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어느 날 교외로 유람을 떠나셨습니다.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한 농부가 거친 숨을 몰아 쉬고 등에 가득 땀이 밴 채로 소를 몰아 쟁기로 논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소가 걸음이 느려지면 채찍을 맞아 살갗이 벗겨지고 상처가 났습니다.농부 자신도 아주 힘들어 고통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밭을 갈며 나온 진흙더미에서 작은 벌레들이 많이 나왔습니다.작은 벌레는 새들에게 먹혔습니다.석가모니 부처님이 소,사람,벌레,새가 벌이는 이 광경을 보시고 자비심을 내어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부처님께서는 이런 중생들의 고통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지,이런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2)우리의 치상

중생간의 살인,은혜와 원망 및 여러 가지 노고 경영,사회에서는 이런 것을 ‘인생을 경영하다’이라 비유합니다.우리는 한평생 자기를 경영하고 자기 사업을 경영합니다.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과 일에 대해 그리고 각종 동물,다양한 부류,그간 했던 다양한 일들에 대해 마치 흔히 있고 이미 습관이 되어 예사로운 일이 된 것처럼 다른 중생,다른 사람이 얼마나 가련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느끼지 못합니다.이런 면을 통해 우리의 동정심,자비심은 부처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백 천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아직 태자였을 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이런 마음을 낼 수 있었고 줄곧 어떻게 자신을 해탈하고 중생을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셨습니다.이런 광경을 우리는 부지기수로 보게 되지만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아도 왜 우리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일까요?왜 우리는 자기 생명의 본질과 세상의 고통이 무상하다는 본질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걸까요?우리 내면의 사유습관,번뇌가 조장하고 업이 조장하여 불법과의 거리가 여전히 그렇게도 요원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자기 마음속의 불법의 위치가 아직도 그렇게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미하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재물,색,명예,음식,잠이라는 오욕을 추구하는 목표는 아주 명확하며 심지어 틀림없기까지 합니다.하지만 불법에 대한 신앙,실천은 언제나 그렇게 동요하고 반신반의합니다.자기의 재물,명예,권력 등 세속사회에서 한 사람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표지와 기준이 되는 것에 대해서만 항상 마음을 쓰고 그것이 너무나 깊숙이 박혀있습니다.

재물,명예,권력 자체는 결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불법을 배운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옳고 그름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며,우리 생명이 나아갈 방향도 아니며,현세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지표도 아닙니다.그것은 세간 사람들이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지표입니다.당연히 이런 명예,재물,지위,권력은 집안 식구를 부양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며 심지어 필수적이기까지 합니다.하지만 이런 것은 자신의 가정과 사회에 대해 마땅히 져야 하는 책임일 뿐입니다.사회와 가정에 대해 짊어진 책임도 물론 불법과 일정부분 연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불법이 아닙니다.왜 이렇게 말할까요?왜냐하면 불법을 배우지 않는 사람도 가정과 사회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때문입니다.역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불법을 가정과 사회에서 운용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불교도는 어떻게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까요?불법으로 우리의 생활과 행위를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3)오욕의 성상

재물,명예,지위,권력 등은 얻는 동시에 배타성,경쟁성,불안정성,불연속성과 불확정성을 갖고 있습니다.예를 들어 당신이 10원을 갖고 있는데,이 10원으로 치약을 하나 샀다고 하면,당신이 치약을 산 것은 다른 것을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이것이 바로 배타성입니다.당신이 치약을 사러 갔을 때,많은 상인들이 자기한테 와서 치약을 사기를 바랍니다.이러한 것 자체가 바로 경쟁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당신이 치약을 사서 집에 돌아와서 어쩌면 집에 소금,간장이 없는 것을 발견할 지도 모릅니다.“이 10원으로 소금,간장을 샀었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금전의 불안정성을말합니다.게다가 우리는 줄곧 돈을 벌 수는 없습니다.그래서 그것에 불연속성도 존재합니다.우리가 만일 조심하지 못해 이 10원을 잃어 버리게 되면,불확정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오욕의 경계를 인식해야 할까요?오랫동안 이런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항상 좋은 것,즐거운 것,원만한 것이라는 느낌만 가졌을 뿐 그것이 갖고 있는 문제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방금 말했듯이,이런 것의 경쟁성에서 그것의 불확정성까지 모두 한발자국 거리이며,언제나 발생할 수 있습니다.만일 불법이라면,지혜라면,한 사람의 자비심이라면,이런 작용과 힘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영원히 자신에게 이로움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영원히 다른 이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그것은 배타성도 경쟁성도 불안정성도 불연속성도 불확정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배타성,경쟁성,불안정성,불연속성,불확정성은 모두 세상 번뇌의 상징이며 모두 무상하다는 특징이 있고,모두 고통의 근원이며 모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우리가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는 대상입니다.

사람은 재물,명예,지위,권력을 갖고 싶어하고 간절히 추구합니다.이런 탐욕심의 불꽃은 아주 맹렬합니다.우리는 본래 탐욕의 번뇌를 갖고 있습니다.자기의 마음은 또 이렇게 강렬한 경계를 향해 쫓으니 틀림없이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입니다.당신이 불에 기름을 끼얹고 있기 때문에 이 불은 갈수록 더 맹렬해지고 자기의 고통도 갈 수록 많아지고 강렬해집니다.플라톤은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가난함은 개인의 재물이 적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탐념이 늘어나는 것이다.”이는 아주 일리 있는 말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서 왕왕 목숨 걸고 돈을 버는 방법으로 욕망을 만족시키며,필사적으로 일하는 방법으로 자기의 빠른 성장을 도모하는 주관적 욕망의 필요를 좇습니다.일을 하여 돈을 벌고,자기가 세상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모두 명예,권력,지위,재물 상의 욕망에서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지 자기 생활에 실제로 필요해서는 아닙니다.이 모든 것은 우리가 불법을 배우는데 방해가 되는 아주 중요한 원인입니다.

4)사욕을 전환하자

어떤 사람들은 아주 똑똑하고 능력이 있지만 자기의 능력,총명함,자질을 자기의 사욕을 채우는 데만 사용하고 자기의 사욕을 자기 일생의 주요한 계획 목표로 만듭니다.다시 말해,자기 일생의 모든 행위가 개인의 욕망,즉 방금 말한 바와 같이 불법에서의 성취가 아닌 세속 사회의 성취를 취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이는 있어서도 안되며,해서도 안 되는 일이며 더욱이 우리의 큰 장애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억제해야 한다거나 혹은 자기는 욕망이 없다고 가장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이는 모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우리는 단지 선법욕에 대한 욕망 즉,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선법욕을 조금씩 키워나가야 만이 개인의 사욕을 다스릴 수 있고,개인이 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회에서 해내는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 생기는 번뇌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자기의 하나의 작은 나,소아에 바빠 있었습니다.이로 인해 자기의 생명은 아주 국한적이고 사소하고 심지어 매우 무료하게 변했습니다.만일 우리 자신의 생명의 방향을 불법으로 전환하고,선법욕에 대한 희구로 전환시키고,불법에 대한 욕구로 전환시킨다면 우리의 희구심은 더욱더 넓어지고,우리의 경건,공경,포용,자비는 부단히 늘어날 것입니다.이런 인생이 아름답고,선량하고,의미 있는 것이며 불법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5)선법의 힘을 강화하자

“욕”의 개념은 자기가 좋아하는 경지에 대해 “어소락경,희망위성,근의위업(於所樂境,希望爲性,勤依爲業:희망하고 본성으로 삼고,근업으로 꾸준히 삼다)”입니다. “소락경(所樂境)”은 자기가 비교적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경지,자기가 비교적 좋아하는 경지,스스로 이런 경지가 자신에게 이익과 즐거운 경지를 가져다 준다고 느끼는 것들입니다.그것은 “희망위성(希望爲性)”으로,그것을 얻고자 희망하고,그것을 갖고자 희망하고 그것을 잃지 않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외재적인 세력의 영향은 아주 강한 것입니다.우리 마음속은 바깥의 경지에 대해 선택할 수도 없고 결정할 방법도 없습니다.내면의 힘은 아주 미약합니다.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선법의 힘을 키워야만이 외부에 존재하는 그런 진성을 오염시키는 경지를 대면할 수 있는 가능과 힘을 가질 수 있고,그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만일 불법에 내재된 힘이 커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자신의 습관과 자신이 선호하는 것에 따라 갈 것입니다.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좇고,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우리가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은 욕망이며 사욕이며 문제점입니다.자연히 우리가 얻게 되는 바도 문제이며 번뇌이며,자기 생명에 불필요한 것들 입니다.개인의 사욕에 대한 이런 만족은 근본적인 번뇌 중의 하나입니다.

선법에 대한 희구는 이와 다릅니다.“근의위업(勤依爲業)” 그것은 자기 정진을 이끄는 주요 근거와 동력입니다.스스로 선법을 희구하고,불법을 희구해야만이 노력할 수 있고 정진할 수 있습니다.만일 우리가 불법에 대해,선법에 대해 희구심이 없다면,그것을 얻고자 할 마음이 없고,그것을 갖고자 하지 않는다면 정진은 자연히 논할 길이 없습니다.정진은 말할 필요도 없고,우리가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이 어렵습니다.우리 마음 속에 열심히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명확해야만 마음 상태가 평온하고 정서가 안정적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기가 불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일 때,일을 하고 생활할 때,사람들과 대할 때,우리의 행동과 말과 생각,즉 신(身),어(語),의(意)삼업(三業)은 모두 세간법이고 완전히 세간의 습관이며 모두 습관 속에서 돌고,자기의 습관을 따라 가고,습관을 따라 배우고,직장을 다니고 일을 합니다.“습관”을 불교용어로 말하자면,“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습성”은 사회에서 말하는 “습관”입니다.우리가 좋은 습관을 기르면 나쁜 습관은 기를 수 없습니다.우리는 경전을 읽는 것을 좋아하거나,참선을 하거나,경전을 보고,좋은 일을 하고,좋은 말을 하는 등의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이런 유형이 좋은 선법에 대한 습관이며 좋은 습성입니다.만일 이런 것들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간의 습관과 습성입니다.

한 사람이 열심히 하는지의여부와 수행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물론 내재적인 경계와 노력입니다.하지만 바깥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자기의 유사한 습성이 무엇인지도 자주 밖으로 나타납니다.만일 우리가 경전을 듣고 불법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자량(資糧)을 모으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는 반드시 불법과 어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만일 매일 잡담을 늘어놓고,시비를 논하고,반연(攀緣)하는 것을 좋아하고,무의미한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면,이는 분명히 세간법과는 어우러질 것입니다.세간법과 불법의 분수령,구별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판단하는 것이지,외부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4.무상을 깨달으면 지혜가 생겨난다

1)무상을 인식하자

성문승(聲聞乘:삼승의 하나,부처의 설법을 듣고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을 이른다)의 사람이 불법을 수행할 때,늘 무상을 강조합니다.미라래빠(密勒日巴)존자는 일찍이 불법의 문에 들어서는 첫 번째 단계가 무상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부처님께서는 궁궐 밖에서 늙고,병들고,죽는 자와 출가한 승려 이렇게 네 명을 보시고는 그때부터 무상을 진정으로 이해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불도를 수학하는 가운데 우리가 발걸음을 뗄 수 있는지 없는지,발걸음을 좋게 시작할지,제자리 걸음을 걸을지의 관건은 무상에 대한 관조와 인식입니다.우리가 무상의 특징,무상의 작용 및 규율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자기의 욕망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오직 무상,즉 세간의 본질과 규율을 진정으로 이해해야만이 노력을 하여 극복하고 자기 내면의 욕망을 추구하는 심리를 다스릴 수 있고,자기의 사욕을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역으로 말하자면,우리는 자기의 마음을 불법에 놓고 불법의 씨앗이 부단히 자기 내면에서 자리를 잡고,싹을 틔워,씨앗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무상을 인식하고,무상이라는 이 법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면 혼침(昏沉),산란(散亂:마음이 방종해서 항상 안정적이지 못하는 것),실념(失念:정념을 잃음),부정지(不正知:대상을 잘못 이해하는 마음 작용)을 쉽게 다스릴 수 있습니다.

무상은 우리가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니며 벗어날 수 없는 규율도 아닙니다.오히려 우리가 바꾸고 이 규율을 주도하는 것입니다.무상하기 때문에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불확정성,불안정성의 인생은 우리가 어떻게 착안하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이는 우리가 생각해보고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인생 전체를 많은 시간이 있다고 보고,자기의 길은 아직도 길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여 노력하고 수행하고,불법을 공부하는 것에 조급해하지 않습니다.우리가 시간을 쉽게 낭비하여 마음이 산란하고 쉽게 번뇌가 일어날 수 있으며,내면에는 쉽게 갖가지 문제가 생겨납니다.만일 우리 내면에 무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내면은 외재적인 갖가지 성취와 갖가지 허울 좋은 현상에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우리가 무상의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불법이 영원히 마음속에 있음을 자나깨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크게는 우주까지 작게는 개인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모든 생각은 무상합니다.

2)불법과 생명의 융합을 이루자

우리가 선법욕을 키우면 자기의 사욕을 다스릴 수 있고,무상을 깨달으면 자기의 탐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한 사람이 만일 선법욕과 무상 위에서 노력하고 애쓰지 않는다면,모든 사람은 아주 강한 탐욕을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예를 들어 좋은 옷,고급시계,고급 자동차,좋은 집,대우 받기를 좋아하는 것 등 욕망은 많고 광대합니다. 우리 일생을 아마도 이런 방면에서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내면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러한 것이면 자연히 우리의 산란한 마음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 자매와 잘 지내며,직장에서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최선을 다하면 자연히 우리는 성과를 얻고 직장,가정,사회의 인정과 긍정적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자기의 마음을 욕망을 좇는 데 쓸 필요가 없으며 욕망을 만족시키는 잘못된 길에다 쓸 필요가 없습니다.하물며,우리가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피곤하고,피로를 느낄 수도 있고,당신이 추구하는 욕망이 반드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빨리 만족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당신이 만족하지 않는 다면,내면에는 공허감이 생길 것이며 내면에 모순,고통 등이 생길 것입니다.몸과 마음의 피로는 마음의 침체,깊은 수면을 야기합니다.

만일 우리가 무상의 마음을 갖는 다면 무상이라는 이 법의 종류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으며,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연히 내가 죽은 후에 무엇을 갖고 갈 것인가?죽은 후에 무엇을 들고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이로 인해,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자기 내면의 어리석음을 근본적으로 다스리고,자기 내면에 불법이 없는 것,무상심이 없는 것을 근본적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만일 내면에 무상이 있다면,자연히 그는 지혜를 나타낼 수 있으며,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개인의 번뇌 욕망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고,내면은 청명하여 불법과 어우러질 수 있을 것입니다.

좀 전에 이야기 한 것이 이렇게도 많습니다.욕망이 개인의 불법 수행 학습에 미치는 영향과 해로움,선법욕과 무상이 스스로 불법을 수행하고 익히는데 끼치는 작용과 도움,그리고 그것은 자기의 탐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우리는 사람으로서 여유와 원만한 수행조건(暇滿)을 갖추어 불법을 들을 수 있으니 자기의 인신(人身)을 잘 사용하여 열심히 수행해야 하며,자기의 내생이 더 좋아지도록 생애를 거듭할수록 더 좋아져 최후에는 원만하게 불과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자기의 마음을 만일 불법을 수행하고 학습하는 길에 쓰고 있지 않고 세간의 여러 악업을 짓는 것에 쓰고 있다면,비록 사람의 몸을 가지고 불법을 들었다 하더라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고 축생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법을 만났다 하더라도 무탈할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진정으로 불법이 “백천만겁이 지나도 만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자기 생명 중 가장 필요한 부분이자,자기 생활의 핵심 내용이며,우리가 현세에서 가장 벗어나지 않아야만 하는 것임을 인식해야만,비로소 착실히 자기의 모든 몸과 마음을 써서,자기 생명의 모든 것을 써서 믿고,실천할 수 있습니다.불법은 자연스럽게 자기의 몸과 마음,생명과 융합할 수 있습니다.자기가 하는 행동이 불법을 대표하고 불법의 정서를 체현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여러분을 격려합니다. 

편집:설원춘
태그:법의 즐거움,욕망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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