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느끼고 깨닫다> 제2장 번뇌를 인식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다

Author:쉬에청 큰스님     기사입력:2016-07-04 12:47:54
2006년 9월 23일, 쉬에청(學誠) 큰스님께서 새로 지은지 얼마 안된 덕진거(德塵居)법당에서 제자들을 위해 <번뇌를 인식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라는 법문을 헤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법을 공부할 때 자주 직면하게 되는 문제,어려움,번뇌,이 모든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이것이 우리가 수행하는 시작이 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덕진거(德塵居)법당에서 여러분과 함께 불법을 말하고자합니다.이 법당에서 처옴 하는 법문이기도 합니다.이 강당은 새로 지은 지 얼마 안되어 비교적 새로운 곳입니다.그래서 여러분이 여기에 와서 새로운 느낌,새로운 면모를 갖게 되었을 텐데이 또한 새로운 출발점업니다.

1.우리 생명에 있어서 불법이 가지는 가치

우리가 이번 생에 불법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며 매우 얻기 어려운 귀한 일입니다.다생다겁(多生多劫)을 지나며 우리는 육도(六道)에서 윤회하고 속세를 돌아다닙니다.오늘 우리가 청정한 삼보가 있는 곳에 와서 이렇게도 많은 우수한 출가인과 재가거사와 함께 불법을 공부하니 더욱더 귀한 일이며 더욱이 말법시대에 흔히 얻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발심과 올바른 지견을 가진 많은 이들이 착실하고 성실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걸까요?다른 각도로 볼 때,불법을 접하기 전에 우리 곁에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우리가 사귀게 된 친구들은 어떤 사람이었나?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어떤 친구들인가?과거에 친구들이 매일 나에게 어떤 내용을 알려줬는가,우리 자신은 또 매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가?무슨 말을 했는가?무슨 일을 했는가?보는 각도를 달리해서 어느 날 한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섭고 또한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하며 더 많은 상황에서는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이러한 것들을 여러분 모두 느낄 수 있고 알아챌 수 있습니다.삼보가 있는 곳에 와서 훌륭하신 스승님과 좋은 벗을 만나고 도반과 함께 하는 그런 기쁨,자신의 생명 가장 깊은 곳에 대한 체험과 느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게 되는 불법의 진정한 이익은 우리 스스로 창조해 낼 수 있는 것도 우리 스스로 발명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우리 모두는 불법승(佛法僧)삼보와 역대 조사,선지식을 따라 배우는 것입니다.성불하기 전에는 계속해서 배워야 합니다.배우기 어려워도 능히 배울 수 있으며 모든 것을 다해 배워야 합니다.우리 모두는 배우는 단계,수행의 단계,자아 완성의 단계,자아 초월의 단계에 있습니다.재가 수행을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출가한 사람들도 또한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더 잘 배워야 재가 거사를 이끌어 수행할 수 있고 모두가 함께 배울 수 있습니다.비교적 오랫동안 배워온 학우들이 점점 더 좋아져야만 승단(僧團)를 더 잘 보호하고 유지할 능력이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삼보가 있는 곳에 들어서고 불문(佛門)에 들어서 함께 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갈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과 불법의 연계이며 자신의 생명 속에 뿌리 내린 불법의 체현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배울 때 자주 맞닥뜨리는 문제,어려움,번뇌, 이 모든 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우리가 번뇌와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번뇌를 만나고 번뇌를 발견할 때가 바로 수행의 시작입니다.만일 우리가 불법을 배우지 않으면 번뇌가 있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라고 여기고 심지어는 번뇌를 분출해내야만 마음속에 번뇌를 남겨두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불법은 이 점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우리 내면에는 업의 씨앗이 있기 때문에 번뇌의 업의 원인이 있고 외재적인 사람과 일,그리고 사물 등 갖가지 경계에 대해 불법에 맞지 않는 생각,허망과 분별심을 초래합니다.수많은 잘못과 단편적인 생각과 견해가 다 나오는 것입니다.

2.불법(佛法)과 세간법(世間法)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을 거쳐 성불(成佛)하여 스스로 완전히 깨달아 진리에 통달하고 제법의 본래 면목을 깨달으시니 즉 승의제(勝義諦:절대적인 진리)-열반,성불의 경계입니다.이러한 성불의 경계는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언어 문자,논리로 설명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체험하고자 하며,열심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도 느끼고,이해하게 될 것이며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며 점차 진보해 나가고 더욱더 좋아질 것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우리가 배우는 불법은 언어,문자,음성에서 시작하지만 불법의 언어,문자,음성과 세간법의 언어,문자,음성은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문제는 우리가 오랫동안 세속사회에서 익히고 이해하고 숙달된 언어,문자,소리,우리의 사유(思惟),우리의 사고방식 등,이 모든 것이 세간법에 근거한 것이며 세간법에 근거해서 진행되는 사고이며,세간법에 근거해서 진행되는 사유,세간법에 근거해서 진행되는 논리 추리입니다.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불법에 대해 배우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갈수록 멀어지고 배울수록 불법에서 요구하는 것과 멀어지고 있습니다.이리저리 배워보아도 진정으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자 하신 도리가 무엇인지,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지,우리가 무엇이 되라 하셨는지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세속 사회에는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당연히 조금의 즐거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통은 많고 즐거움은 적습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은 차츰차츰 이 문제를 해결하여 즐거움은 더 많게,고통은 더 적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세간법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단지 고통은 늘리고 즐거움은 감소시킬 뿐입니다.불법은 즐거움은 늘리고 고통은 감소시키며 종국에는 고통을 없앨 수 있습니다.이런 가치관,이런 궁극적 목적은 세간법과는 두 갈래 길처럼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종교이며 불법입니다.불법은 본래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것이며 우리 개인 생활의 핵심 내용입니다.한 사람이 만일 불법을 지니고 실천하지 않으며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생활에 핵심부분이 결핍되는 것이자 우리 생활의 의의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고 구현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우리 생활의 의의를 구현해 내지 못하면 자연히 우리 생활의 즐거움도 없어지는 것입니다.우리의 생활에 왜 즐거움이 있나,우리의 행위에 왜 의의가 있는가 그것은 곧 불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3.명과 상은 무자성(無自性)이며,선법은 좋은 약이다

1)허망한 명상(名相)

불법은 한편으로는 언어문자의 도움을 빌리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언어 문자에 구속 받지 않고 초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이는 우리가 언어 문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그리고 명(名)과 상(相)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예를 들어 여러분이 나의 이 손을 봤다면 한쪽 손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또 이 손은 왼손이다,오른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왜 이것이 오른손이다 이것이 왼손이다라고 말하는 걸까요?이는 나의 이 몸에 비춰볼 때 이 손이 내 몸의 오른쪽에 있으므로 오른 손이라고 하는 것이오,이 손이 내 왼쪽에 있으므로 왼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하지만 동시에 이것을 손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모든 사람의 몸에는 두 개의 손이 다 있습니다.

내가 이런 비유를 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왼쪽과 오른쪽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몸에 대고 말하는 것입니다.반대로 자신의 몸에 빗대어 말하지 않는 다면 좌(左)와 우(右)라는 이름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세간의 모든 사물에 대해 우리는 모두 한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이름을 지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이름을 들을 수 있고 마음속으로 이 물체의 형태와 형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즉각 그 사람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고 예를 들어 인민대회당,자금성 같은 건축물을 들으면 마음속에서 즉각적으로 그 형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명(名)과 상(相)의 관계입니다.역으로 명 안에는 일정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혹은 특정한 내용을 포함한다고도 합니다.그렇다면 상은 어떻습니까?상은 형상,모든 법,세간법과 출세간법,그리고 자기만의 독특한 상태와 의미를 내포합니다.

세간의 모든 명(名)과 상(相)은 모두 변하는 것이며 가명 가상으로 만든 것입니다.가명(假名: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없고 이름만 있음)과 가상(假相:인연에 의해 생성소멸 하므로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로 실체가 없는 일종의 환상적 현상)을 만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예를 들면,우리는 어릴 때부터 커가는 동안 시시각각 변화합니다.그러므로 이 상(相)은 가짜입니다.변화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우리의 이름도 마찬가지 입니다.당신이 이름을 바꿀 수도 있고 오늘은 이렇게 부르고 내일은 또 바꿔서 부를 수도 있습니다.이름을 바꾸려면 파출소에 가서 바꾸면 그만입니다.사실상 우리 인간은 자신의 이러한 가명,가상을 참된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 자신의 가명,가상에 집착하므로 모든 문제가 여기서 야기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에게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며 명과 상이 모두 공한 것이고 무자성(无自性:본래 자성과 실체가 없음)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우리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것은 진실된 것이 아니며 모두 허망한 것입니다.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세간의 모든 법의 허망한 분별(虛妄分別),여러 가지 명과 상을 알려주신 목적은 이 세간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 세상에 집착하거나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이 세간을 초월하고 이 세간의 모든 명과 상을 해탈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우리는 번뇌를 없애는 방법과 불법으로 가명,가상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벗어나야 합니다.차츰 차츰 이런 역량을 길러내야 합니다.이런 역량의 배양은 불법에 의지하고,수행에 의지해야 하며,노력에 의지해야 합니다.이렇게 해야만이 비로소 번뇌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번뇌를 인식할 때 그때가 바로 수행의 시작입니다.우리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번뇌를 없애야 할까요?방금 명과 상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 했는데 이제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착한 마음에서 지혜가 생긴다

현대 사람들은 다 총명하고 지능이 높고 지력이 좋습니다.“현대의 사람은 지나치게 총명하다” 우리는 이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지나치게 선량한 사람” 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총명한 사람이 다 선량한 것은 아니며 선량한 사람이 다 총명한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목적은 스스로를 더욱더 선량하게 하고 더 좋게 바꾸며,모든 이에게 선량하게 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불법은 한 사람의 본성,본심,신(身)ㆍ어(語)ㆍ의(意)삼업(三業)을 더러움 없이 청정하게 하고 사사로움이 없으며 아집(我執)이 없게 합니다.한 사람이 자비심,원력을 모두 갖추면 이 사람은 자연히 선량해 질 것입니다.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능력,문화지식,지혜를 배양하기 보다는 착한 마음,좋은 마음,어려운 현실을 탄식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키우고 우리의 불성을 깨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에게 이런 심리가 있고 우리 마음속에 이러한 큰 힘이 있다는 것으로 이는 불법의 씨앗이 우리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티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일 우리 마음속에 선량함이 있다면 자연히 우리의 지혜가 나타날 것입니다.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사람과 일,그리고 사물에 대한 생각,인식,판단이 세간 사람과 다르며,다른 사람들과도 다릅니다.우리는 유루선법(有漏善法:번뇌를 가진 선법)에서 차츰 무루선법(無漏善法:번뇌를 벗어나는 선법)으로,무위선법(無爲善法)으로 변해가야 합니다.그러므로 불법이 해결하려는 것은 선악의 문제이며 또한 번뇌와 지혜의 문제입니다.지혜는 선이요,번뇌는 악입니다.선악의 특징은 지혜,번뇌로 구분합니다.

4.불법은 원만한 신앙이다

1)신앙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

우리가 한 민족을 이해하고,이 민족이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이 민족이 좋은지 아닌지를 보려면 이 민족이 신앙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세계든 우리 나라든,많은 민족이 어떠한종교를 믿고 있습니다.예를 들어,불교,이슬람교 등 많은 민족이 한 종교를 믿기도 하고 같은 민족끼리 다른 종교를 믿기도 하며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우리가 한 사람을 알려고 할 때도 이와 같습니다.그가 무엇을 믿고 어떤 신앙이 있는가 이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만일 그 무엇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아주 큽니다.무엇도 믿지 않는 다는 것은 허무주의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사람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불교를 믿는 것이 가장 좋으며,가장 결과가 원만하고 가장 온당합니다.당연히 이는 우리가 출가인이고 불교도이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지요.사실 우리는 진정한 체험을 하고 진정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없으며 근거가 있는 얘기인 것입니다.

2)신심(信心)은 아주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신앙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안정되고신심이 생기며,원만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목표와 근접할 수 있을까요?자신의 생명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할까요?이것은 자기 정위(自己定位)하는데 큰 관련이 있습니다.자기 정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바로 어떻게 자아를 인식하는가,어떻게 자기를 인식하는가,생명의 전체 역정 중에서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자신의 시작점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리를 정할 수가 없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우리 몸은 비록 이 법당 안에 있지만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우리가 집에 있어도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우리 몸은 직장이나 학교에 있는데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나요?이 마음은 영원히 조금도 귀의하는 바가 없으며,영원히 놓아 두는 곳이 없습니다.왜 마음은 영원히 귀의하지 않는 걸까요?이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무엇이든 의심하고 어떤 것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의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이런 믿음,삼보에 대한 신심(信心)을 키우려고 하는 것입니다.이런 믿음을 키워야만 우리의 선량함을 깨울 수 있으며 우리의 지혜를 일깨울 수 있으며,우리 마음 속의 갖가지 번뇌와 업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만일 믿음도 없고,신앙도 없다는 전제라면 우리 모두의 모든 것은 단지 문자와 이론 상으로만 미루어 판단하여 결론을 도출할 수 밖에 없습니다.문자와 이론상에서의 추론은 자기의 생명과 서로 관계가 없으며 이런 의의는 크지 않습니다.그는 진정으로 불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며,종교적 행위도 아니며 이 방면에서 우리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특별히 주의하라는 것은 우리가 자주 이런 잘못을 범할 수 있고 이런 문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말합니다.이런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혹은 오늘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내일 또 나오고,내일 해결한다 하더라도 모레 다시 나와 근본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이런 측면을 우리는 다스려야 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3)번뇌를 다스리려면 수행에 의지해야 한다

어떻게 번뇌를 다스리고 주의해야 할까요?나 자신의 사상,나 자신의 생각이 불법에 부합하는지,여리여법(如理如法:불법의 도리)에 맞는지,문제가 있는 지를 주의해야 합니다.즉 우리가 삼보에 대해 불법에 대해 의심을 할 때 번뇌는 나타납니다.번뇌가 나타날 때 불법에 의지해 다스려야 합니다.우리가 하나 하나를 비교해 보면 우리의 사상이 이미 불법을 벗어나고 불법을 위배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이런 사상은 버려야 합니다.이렇게 우리의 인지,우리의 견해는 곧바로 조정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요?수행을 해야 합니다.수행이야말로 진정으로 다스리는 법입니다.유대교 신도들은 그들의 안식일에는 절대 일을 하지 않고,기독교도들은 매주 일요일에는 반드시 예배를 드리러 가며,무슬림은 매일 메카를 향해 다섯 번 기도를 올립니다.왜 그럴까요?그들의 마음속에 시시각각 자기 신앙의 대상에 대해 진정으로 귀의하고 진정으로 회귀할 수 있기 때문이며,진정으로 자기의 이러한 세속에서 산란(散亂)한 신(身)ㆍ어(語)ㆍ의(意)삼업(三業)의 행위를 삼가(收斂)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럴듯하게 불교를 배운다 하고 불교신도라고 해도 실제적으로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법의 관념에 근거하여 실천하거나 실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번뇌를 다스리고,진정으로 열심히 수행을 할 때,예를 들어 경전을 읽고 참선을 하고 혹은 토론을 하거나 혹은 불법을 들어 비유하고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려 할 때,힘을 쓰고 열심히 노력할 때,불법을 이용할때 비로소 자신이 현재 어떤 조건을 갖고 있고 스스로 내면의 번뇌를 다스릴 수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만일 우리가 일부러 힘을 들여 번뇌를 다스리지 않으면 하루 내지는 일년 내에 무명의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마음을 다해서 다스리고 열심히 할 때 비로소 방법을 통하여 우리의 문제,우리의 번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자신의 문제,번뇌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시작이자 노력의 시작입니다.만일 발견하지 못하거나 발견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하든 마음의 외면에서 힘을 쓰는 것이며 마음의 외면에서 불법을 논하고 불법의 도(道)를 논하는 것입니다.

5.불법을 공부하는 방법과 경로

1)공동 수행의 수승함

모두들 비교적 일이 바쁘긴 하지만 우리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도반들과 공동 수행하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이렇게 해야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 선법의 역량이 부단히 강화될 수 있습니다.집에 있을 때 자기 혼자서는 자비심,지혜,원력을 배양하기가 힘들며 일깨우기가 힘듭니다.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성격은 괴팍해지고 무리와 어울리기 쉽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기도 쉽지 않으며 남을 돕거나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가장 기본적인 사람으로서의 처세의 길조차도 터득하지 못하고 잘 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며 보리심을 내고 대승심을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대승(大乘)불법을 배우는 것과 이승(二乘)을 배우는 것은 다릅니다.이승을 배우겠다고 말하는 사람은적습니다.우리는 모두부처님에 따라 배워야 하며성불(成佛)이 되어야 합니다.나한(羅漢)에 따라 배우고나한이 되고싶은 사람은적습니다.기왕 우리가 불법을 배우려 하니 불법을 배우는 방법과경로가있어야 하며 이런 방법과경로를따라 가야만이 성불할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불법을 배우는 것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데 어떻게 불법을 배우는 것을 말할 수 있겠으며,성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우리가 불법을 배우려면 반드시 원대한 목표,높은 지향점이 있어야 하며 깊은 생명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이러한 생명의 체험을 얻는 것은 수행에 달려있습니다.원대한 생명의 목표와 지향은 우리의 발심,발원에 의지해야 합니다.우리가 부단히 발원해야만 내재적인 생명의 잠재능력이 부단히 끓어오를 수 있습니다.발심을 잊지 않아야만이 미망(迷茫: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또는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자아를 잃지 않아야만이 생명은 방향이 생기게 됩니다.불법에 대한 진정한 체험이 있어야만이 이런 동력이 고갈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이는 하나로 이루어졌으며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습니다.

한 명,열 명,백 명이 지은 업의 행위 결과는 다릅니다.한 사람의 업력은 미약하지만 열 명,백 명,천 명의 업력은 아주 큽니다.우리 개개인은 하나의 불꽃과도 같습니다.한 점의 불꽃은 부주의하여 바람에 꺼지면 다시 타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우리가 이러한 불꽃을 하나 하나씩 모아 횃불로 만들면 영원히 타오르고 영원히 빛을 발하며 영원히 인간 세상을 비추어 모든 유정물을 이롭고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이는 한 방울의 물이 바다 속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신(身).어(語).의(意)삼업(三業)으로 신앙을 해석하자

우리가 어떻게 불법을 실천해야만이 자기의 생명 속에서 불법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를 하고 자기 생명의 잠재 능력을 부단히 발휘할 수 있을까요?방금 신앙에 대해 말했습니다.무엇을 믿습니까?삼보를 믿고,업과(業果:선악의 행위.곧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과보로서 고락의 갚음을 받는다는 뜻)를 믿습니다.업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그러면 어떻게 삼보를 믿고,어떻게 업과를 믿나요?어떻게 믿는가는 단지 업과의 원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삼보의 의의를 인식하느냐 뿐만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 어떻게 믿는가를 명확히 하는 것이지 신앙의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냐 하는 것 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믿어야 하나?우리의 실제적인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삼업(三業)의행위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믿는지를 해석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신앙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신앙은 곧 우리의 신(身)ㆍ어(語)ㆍ의(意)삼업(三業)속에서 구현됩니다.바꿔 말하면,우리의 신(身)ㆍ어(語)ㆍ의(意)삼업(三業)의 일체는 신앙의 기초와 신앙의 근본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는 세간과 다릅니다.우리의 행위는 특별한 의의를 가지며,우리의 행위가 성불(成佛)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자신의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삼업(三業)의 행위로 불법을 해석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꿀 수 있고 자신의 생명이 진정으로전환될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은 여전히 자신이며 불법은 그대로 불법으로 두 개는 영원히 하나로 결합할 수 없습니다.

3)부처님 이 개척하신 길을 가자

불법은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대승불법은 모든 사람들이 성불하고 대승심을 낼 수 있도록 합니다.대승불법은 과거에 한 척의 큰 증기선이나 차량에 비유되었습니다.우리가 바다를 건너려 하면 수영을 해서는 못 건너갑니다.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이때 증기선,차량의 힘이 필요하며 불법의 힘이 필요합니다.그러나 차를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예를 들어 다리를 세우고 길을 정비하는 것 말입니다.만일 당신이 다리를 세우면 모두가 다리 위를 걸을 수도 있고 차를 탈 수도 있습니다.그 사람은 고통의 바다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길을 정비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 말의 뜻은 길을 여는 사람은 어떤 때는 차를 모는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만일 길은 없고 차만 있고,운전을 할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차를 몰고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불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과거의 부처님,조사대덕께서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길 위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여기에 길이 있고 우리는 길을 보았습니다.길이 있으니 반드시 목적지가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삼보가 있는 곳에 자주 와서 충전하자

가끔씩 자기 차가 길을 가다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차로 운전하면서 갈 수 없는 상황도 생기게 마련입니다.차가 고장 나거나 기름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등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그러면 기름이 부족하면 어떻게 합니까?기름을 넣어야 합니다.차가 고장 나면 점검을 받고 수리를 해야 합니다.그래야만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우리가 절에 오는 것은 자신의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삼업(三業)을 점검하고 수리하는 것입니다.모든 몸과 마음을 점검하고 수리하고 또한 충전하고 기름도 넣는 것입니다.이렇게 해야만이 우리가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전 과정 동안 그 길을 갈수록 안정되고 멀리 갈 수 있으며 길을 잃지 않고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한 두 번의 충천으로는 부족합니다.열 번,백 번도 부족합니다.영원히 힘써 노력해야 하고 발심해야 하며,영원히 계속 해야 합니다.만일 당신이 한번 하고 오래 쉬면 내면의 원동력이 부족할 것이며 떨어질 것입니다.

삼보가 있는 곳은 발전소와 비슷하여 안에는 모든 이에게 충전해 줄 만큼 충분한 전원이 있습니다.모든 사람이 삼보가 있는 곳을 떠날 수 없으며 삼보를 떠날 수 없고 도반과 선지식의 나에 대한 도움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만일 삼보가 있는 곳에 이런 분위기가 없다면 불법은 전승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이런 화합과 공동 수행을 통하여 높은 경계로 올라가는 분위기 조성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이는 모두의 힘에 의지하며 모두의 발심에 의지해야 합니다.우리가 절에서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것은 한 두 개의 간단한 개념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불법의 개념은 한번,두번,하루,이틀,일년,이년,삼보의 곳에서 천천히 영향을 받으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오승 불법(五乘佛法),계정혜(戒定慧),탐진치(貪嗔癡)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불법의 명언 개념 몇 개만을 얻으려 온 것이 아니며 모든 실천과정은 필수적인 중요 구성 요소이자 수행 학습 생활의 핵심요소입니다.

6.어떻게 불법과 어울릴 수 있을까

사람의 언어는 한계성을 갖고 있으나 부처님의 경계는 무한하다고 말했습니다.부처님의 경계는 끝이 없고 원만하며 무한합니다.우리는 세간의 모든 언어를 사용해 불법을 설명하지만 설명하기 어렵고 설명이 부족합니다.불법은 영원히 이렇게 간단한 의의로 그치지 않습니다.우리는 이러한 명칭에서 정체될 수는 없으며,더욱이 이러한 형식에서 정체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형식”이란 무슨 뜻일까요?형식은 외적인 부분입니다.종교의 이런 형식에 얽매이며 불교의 이런 형식에 얽매입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의 내포,그것의 핵심입니다.내포는 불법의 한 부분이며,핵심도 불법의 한 부분입니다.내포든 핵심이든 관건은 바로 불법입니다.

불법은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이해함에 있어 천차만별로 각기 달리 이해합니다.사람마다 불법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우리는 본래 각기 다른측면에서 불법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관건은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이러한면에서 자신이 상응하는부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팔만사천 법문은 모두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합니다.부처님께서는 “귀원무이로(歸元無二路),방편유다문(方便有多門)”라고 말씀하셨습니다.각기 다른 법문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행(現行:현재의 행하고 있는 문제점)을 다스리기 위함이며 모두 우리의 신심을 일깨우기 위함이자 우리로 하여금 더 오랫동안 원대한 마음을 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부터 많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셨으며 그렇게 많은 부처님,조사대덕께서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의 업장이 무겁기 때문입니다.중생은 너무나도 많아 끝없이 무한하니 어떤 중생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인연이 있고 어떤 중생은 미륵 부처님,아미타불,관세음보살,문수보살,보현보살,지장보살과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각기 다른 부처님이지만 같은 대원(大願),즉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대원을 갖고 있으십니다.하지만 그 인연은 다릅니다.인연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들 범부(凡夫)의 조건에 의해 결정됩니다.우리 스스로가 갖고 있는 조건이 우리가 어떤 부처님,선지식과 적합한지를 결정합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어떤 마음을 내고,어떤 발원을 하여 무슨 기준에 근거하여 실천하느냐에 따라 후에 어떤 불법과 적합해 지는 것이며 어떤 부처님과 적합해집니다.어울리는지의 여부,적합한 정도는 모두 불법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이지 형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형식으로 판단을 하면 모든 이가 다 삼보의 제자며 불교도이니 이는 분명히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비록 모든 사람이 불교도이고 삼보의 제자일지라도 모든 사람은 또한 각기 다르고,다른 것은 불법에 대해 상응한 정도이며,상응한 점이 다릅니다.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우리가 시작점을 찾고 착수점을 찾아야 하며 상응한 부분을 반드시 찾아야만이 우리는 신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연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우리가 길을 찾지 못하고 많은 불보살과 많은 경전,많은 선지식에 대해 신심을 내지 못하거나 가벼이 여겨 훼손하고 비방하며 믿지 않는 등의 행동은 모두 우리 스스로의 업장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우리가 업장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생겨나지 않거나 혹은 다른 법문에 대해서 신심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이 둘은 다른 의미입니다.하나는 우리가 자신의 입장과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가 아직 배우지 못한 이런 불법,아직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부처님,조사대덕에 대해 우리는 어떤 마음이며 어떤 상태이며 어떤 태도인가 하는 것입니다.이는 중요합니다.이것은 우리가 배운 것이 아직 부족하고 잘 배우지 못했음을 최소한도로 설명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충분히 배우고 잘 배우면 통달할 수 있습니다.모든 법은 비슷합니다.모든 법은 서로 통합니다.모든 법은 장애가 없으며 부처님의 길은 같습니다.이는 분명한 것이며 모두 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눈 주제는 자기 생명 중에 연기점(緣起点)에서 어떻게 불법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인식하고 노력한다면 이런 신심은 반드시 부단히 강해질 것입니다.이로써 여러분께 바칩니다.

오늘은 중화민족의 전통 명절인 중추절입니다.중추절은 설날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명절입니다.또한 “10월 1일” 황금주간을 맞아 여러분들이 크게 발심하여 용천사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하고 일주일간 <능엄경(楞嚴經)>을 읽어 많은 자량을 모았습니다.비록 지붕도 없는 노천이었지만 청정하고 장엄하였으며 공양품이 풍부하여 정교한 물건이 가득합니다.이로써 부처님에 대한 여러분들의 무한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편집:설원춘
태그:번뇌를 인식하다,수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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